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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는 정말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1929년에는 흑인 후보가 없었는데 2020년에는 흑인 후보가 1명이나 있네요.”
9일(현지시간)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시작과 함께 코미디언 스티브 마틴의 독설로 포문을 열었다. 올해 남녀 배우 주·조연상 부문에 유색인종 후보가 영화 ‘해리엇’으로 후보에 오른 신시아 어리보 뿐인 것을 비꼰 것이다. 수상식이 끝난 직후 오스카의 역사는 전환점을 맞았다. 미국영화과학아카데미는 시상식 직후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봉준호 감독 사진을 올리며 ‘역사를 만든 순간’(When you make history)이라는 코멘트를 달았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관전 포인트는 비 영어 영화인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 여부였다. 평단의 호평과 상업적 성공, 칸 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유수 영화제의 수상을 모두 누렸지만 오스카 작품상은 백인과 영어권을 중심으로 한 미국 주류 문화계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봉 감독마저도 지난해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영화가 한 번도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오스카는 지역 축제(They’re very local)‘라고 답했듯 아카데미는 올해도 안전한 선택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시상식 직전까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병사들의 사투를 다룬 영화 ’1917‘이 작품상을 차지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 이유다.
스티브 맥퀸 감독이 2014년 86회 시상식에서 흑인 감독 최초로 작품상을 받았지만 감독상은 흑인 감독이 수상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아시아계 감독으로는 리안 감독이 2006년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감독상을 받았지만 영어로 만든 영화였다. 봉 감독은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두 번째 아시아인 감독이다.
인종에 대한 장벽만큼이나 비 영어권 영화에 대한 장벽은 더 높았다. 오스카 투표권을 가진 아카데미 회원들은 자막을 읽으며 몰입해야하는 외국어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이 때문에 제 11회 시상식에서 프랑스 영화 ’위대한 환상‘이 작품상과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함께 오른 이후 지난해 영화 ’로마‘에 이르기까지 총 10편의 외국어 영화가 작품상의 문을 두드렸지만 단 한 차례도 수상하지 못했다.
흑인 동성애자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문라이트‘(2017년 작품상),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와 백인 운전사의 우정을 다룬 ’그린 북‘(2019년 작품상)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해 온 아카데미는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어 마침내 난공불락과도 같은 작품상을 한국인 감독이 만든 한국어 영화에 안겼다.
뉴욕타임스는 “92년의 오스카 역사는 ’기생충‘이 외국어 영화로 최초로 작품상 수상을 하는 순간 산산이 흩어져버렸다”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외신들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더욱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AP통신은 “외국어 영화를 늘 별도의 항목으로 좌천시켰던 아카데미 시상식의 새 분수령이다. 기생충이 할리우드가 관행을 벗어던지고 진보의 신호를 보내게 했다”고 분석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오스카의 새 시대를 알렸다. 봉 감독 본인에게도 큰 사건이지만 오스카에게 더 큰 사건”으로 평가했다.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