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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서 하게 놔둡시다, 예?”[오늘과 내일/이승헌]

입력 | 2020-01-14 03:00:00

회의 진행도 합의 못해 검찰에 떠넘기다
검찰의 합법적 개입 자초하며 정치 실종




이승헌 정치부장

위 제목은 영화 ‘신세계’에서 조폭 역의 황정민이 경찰 역의 최민식에게 하는 대사 중 일부다. 경찰이 조폭의 차기 수장 선출 과정에 개입하자 황정민이 뇌물을 주면서 ‘우리 일에서 손떼라’라고 한 것. “그쪽에서 너무 깊이 개입하시는 거예요”라고도 한다. 그러자 최민식은 “우리는 니들한테 바라는 거 별거 없어. 그냥 주제 파악 잘하고 말만 고분고분하게 잘 들으면 돼”라며 거절한다.

검찰이 지난해 4월 패스트트랙 충돌 사건에 관여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의원, 민주당 이종걸 의원 등 여야 의원 28명을 2일 무더기 기소한 뒤, 이 영화가 생각난다는 정치인들을 여럿 봤다. 요즘은 청와대, 법무부와 윤석열 검찰총장이 벌이는 싸움에 눈길이 쏠려 있지만 정치권의 진짜 관심은 서울 남부지검의 사상 첫 패스트트랙 기소다. 특히 황 대표와 한국당 의원 17명은 국회법 중 이른바 국회선진화법 조항 위반으로 기소돼 500만 원 이상의 벌금형만으로 5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되고 의원직을 잃게 된다. 재판 결과에 따라 총선 이후는 물론이고 2022년 3월 대선 지형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다 보니 야당을 중심으로 “검찰이 정치 지형까지 짜겠다는 것이냐”는 하소연이 들린다.

검찰은 이런 반응이 억울할 것이다. 정치권이 ‘동물 국회 종식’을 외치며 만든 법에 근거한 것이고, 자기네들끼리 치고받다가 고발한 건을 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됐든 한국당의 대선 주자와 중진들의 정치적 미래가 검찰의 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필자는 언제부턴가 정치권 내부에서 소화하고 처리해야 할 일을 검찰에 떠넘기다가 결국 검찰의 합법적인 정치 개입을 자초했다고 본다. 검찰 탓할 게 아니다. 선수들끼리 해결해 관중(유권자)의 판단을 구할 일에 걸핏하면 외부 심판을 부르다가 스스로 발목을 잡아버린 것이다. 2007년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후보 간 경선이 대표적이다. 이 전 대통령의 도곡동 땅 실소유주 의혹, 박 전 대통령의 영남대 재단 관련 의혹 등을 놓고 난타전을 벌이더니 경선 도중 고소·고발로 이어졌다. 물론 언젠가는 사법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긴 했다. 도곡동 땅 의혹은 정권이 바뀌어 지금 다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문제는 유권자가 표로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에 검찰이 야당의 대선 경선에 들어와 휘젓도록 정치권이 판을 깔아줬다는 점이다.

이번 패스트트랙 기소 사건은 더 나아가 이제 여의도가 실질적 정치 실종 상태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토론과 협상의 토양이 아직 부족한 한국 정치 환경에서 여야가 회의 진행과 의사일정을 놓고 충돌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원래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것이다. 문제는 이전에는 싸우더라도 여야가 물밑 협상을 벌여 절충점을 찾았는데, 요새는 서로 삿대질만 한다. 그러고는 고소·고발을 해서 ‘정치적 행위’의 영역에 있던 것을 사법적 판단의 영역으로 밀어 넣으며 스스로 정치의 존재 이유를 지워 버리고 있다.

다들 이번 총선이 중요하다고 한다. 차기 대선을 포함해 향후 정치 지형의 가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이번 총선전에 뛰어들기 전에 여야가 국민 대의기관으로서 최소한의 자존감을 회복하자고 진심 어린 다짐부터 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정치권을 욕하고 경멸하면서도 뭔 일 있으면 왜 죄다 국회로 몰려가겠는가. 헌법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정치는 여전히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