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면 거대한 성이 되는 호텔 외관은 세트 없이 순수 컴퓨터그래픽(CG) 기술로 창조했다. 호텔 내부는 경기 용인시에 6600m²(약 1996평) 규모의 드라마 촬영장에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 디지털아이디어 제공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 대본에 실제 등장하는 글귀다. 밤에 찾아오며 낡은 건물이 고층 호텔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기억하는 시청자라면 이 표현은 참으로 단출하다. 사실 드라마에서 전남 목포시에 있는 2층짜리 근대역사관이 모델인 건물은 해리포터 호그와트 마법학교보다도 근사한 초대형 호텔로 바뀐다. 이제 국내 영화나 드라마도 덜 떨어진 컴퓨터그래픽(CG)을 ‘국뽕’으로 참고 보는 시대는 진즉에 지나갔다.
최고 시청률 10.45%(닐슨코리아)를 찍은 ‘호텔 델루나’는 특히 국내 시각효과의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한국 드라마에서 특화된 판타지 장르답게 CG분량이 넘쳐난다. 귀신이 소멸되는 특수효과부터 간판이나 현장 스태프를 지우는 소소한 기술까지 이미 4000컷 가까이 CG 작업을 완료했다. 이 드라마의 CG 작업을 맡은 ‘디지털아이디어’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시각효과기술(VFX) 업체다.
1998년 설립된 시각효과기술(VFX) 업체 ‘디지털아이디어’의 박성진 대표. tvN 제공
디지털아이디어는 ‘퇴마록’(1998년)을 시작으로 국내외 영화와 드라마 400여 편의 CG 제작을 담당해왔다. 기차를 향해 질주하는 수백 명의 좀비 떼(영화 ‘부산행’)나 고구려와 당의 치열한 전투 장면(‘안시성’)도 이 업체가 맡았다. 판타지 드라마 ‘도깨비’(2016년)와 개화기 시대를 다룬 ‘미스터션샤인’(2018년) 등도 마찬가지. 뭣보다 게임과 현실을 오가는 tvN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증강현실(AR) 기술을 사실적으로 구현해 화제를 모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VFX업체지만, 매주 밀려드는 촬영본 400여 컷을 작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호텔 델루나’는 전담인력만 250명이 넘게 투입했다. 100% 사전제작 드라마는 아닌지라, 대본과 촬영 일정이 밀려 마감 시간이 피가 마를 때도 여러 번이었다.
“영화는 촬영 뒤 개봉할 때까지 4~6개월 정도 시간이 있어요. 작업량도 2000여 컷 정도죠. 근데 드라마는 제작기간도 유동적이고 분량도 훨씬 많아요. ‘미스터…’은 8000여 컷, ‘알함브라…’는 6000여 컷을 작업했어요.”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 장만월(아이유)은 죽은 백두산 호랑이의 원혼을 달래준다.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이 호랑이 컴퓨터그래픽(CG) 작업물을 완성하는 데 3개월이 걸렸다. 제작을 담당한 디지털아이디어는 그간 개발연구팀을 만들어 호랑이, 독수리, 고릴라, 용 등 사실적인 크리처(생명체) 기술력을 축적해 왔다. tvN 제공
디지털아이디어 제공
연쇄살인마 설지원(이다윗)에게 살해당한 귀신(사진 왼쪽). tvN 제공
2011년부터 중국 시장에 진출해 규모를 키워온 디지털아이디어는 지난해 반가운 계약도 따냈다. 지난해 ‘앤트맨과 와스프’, 올해 ‘스파이더맨:파 프롬 홈’ 등 마블 영화의 스크린X 가공 자격(영화관 좌우벽면 영상 제작)을 획득했다. 박 대표는 “한 달 반 정도 제작한 영상 (수준을) 보고 마블에서 깜짝 놀랐다”며 “제작비가 할리우드 수준만 된다면 그들보다 더 좋은 CG를 뽑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 국내 시각효과 기술 꾸준한 성장…CG산업 전망 밝지만은 않아 ▼
국내 시각효과 기술(VFX)은 20여 년 동안 줄기찬 성장을 거듭하며 세계적 수준에 버금가는 진보를 이뤄냈다. 국내에서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이 처음 등장한 영화는 ‘구미호’(1994년)였다. 당시 배우 고소영이 여우로 변신하는 과정은 하나의 형체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변하는 ‘모핑’ 기술을 썼다. 물론 ‘쥬라기 공원’(1993년) 등 미국 할리우드 영화와 비교하면 기술력은 격차가 컸다.
‘쉬리’(1998년)에선 고층 빌딩 폭파와 도심 총격전에 CG가 쓰였다. 지금과 비교하면 길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이후 조금씩 활용도는 늘어났다. ‘태극기 휘날리며’(2003년)에선 팔다리가 잘려나간 군인들을 비롯해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공군이 생생하게 구현됐고, ‘중천’(2006년)에선 실제 배우의 외모로 동작을 대신하는 ‘디지털 액터’ 기술을 선보였다. 그 성과로 한국의 CG업체들이 모여 만든 컨소시엄은 할리우드에 진출해 영화 ‘포비든 킹덤’(2008년)의 특수효과 작업을 총괄하기도 했다.
중국 시장 진출은 2010년대부터 이뤄졌다. 덕분에 국내 업체 수도 100여 개로 늘었고, 100명 이상 인력을 가진 대형업체들도 생겨났다. ‘적인걸2’(2013년), ‘미인어’(2016년), ‘홍해행동’(2018년), ‘유랑지구’(2019년) 등 중국에서 좋은 흥행 성적을 낸 블록버스터 영화에는 매크로그래프, 덱스터스튜디오, 디지털아이디어 등 국내 업체들이 참여했다.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국내 CG 산업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외 진출로 활로를 모색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국내 블록버스터 영화가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업체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것도 악조건이다. 한 VFX업체 관계자는 “제작비에서 인건비를 제하면 연구개발에 비용을 투입할 여력이 없다. 일부 대형업체를 제외한 군소업체들의 경영난이 가중되고 있다”고 했다.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도 걱정거리다. VFX업계 관계자는 “근로시간 단축으로 제작 단가를 올릴 수밖에 없지만 경쟁이 치열해 영업이익을 내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