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청산에서 통했던 원칙 제일주의, 한반도 주변 변칙 싸움꾼에도 먹힐까
이승헌 정치부장
명실공히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 중 한 명은 얼마 전 정치인으로서 문 대통령의 특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여러 특징이 있을 텐데 망설임 없이 ‘규범’을 골랐다. 법이나 원칙을 잘 지킨다는 뜻도 있겠지만 스스로 정한 기준을 허물지 않겠다는, 정치적 고집에 방점이 찍힌 말이었다.
#2. “그래서 별명이 고구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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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떠오른 것은 한 달간 우리 주변에서 잇달아 벌어진 사건들을 보면서다. 최근 한 달처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북한이 돌아가며 한반도를 정신없이 들었다 놨다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았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4일부터 초유의 대한(對韓) 경제 보복 중이다. 러시아는 우리 영공을 무단 침범했고, 중국은 러시아와 카디즈를 넘나들었다. 김정은은 트럼프와 악수한 지 한 달도 안 돼 신형 잠수함, 탄도미사일을 선보이며 한 달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하나같이 국제사회에서 말하는 일반적 통념(conventional wisdom)의 틀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사안들이었다.
필자는 이 한 달을 지켜보며 우리가 트럼프, 시진핑, 푸틴, 아베, 김정은을 통칭할 때 사용하던 ‘스트롱 맨’이란 표현을 이제 그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2019년 7월 현재 이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권투로 치면 변칙 복서, 격투로 치면 유파(流派)나 규칙이 딱히 없는 ‘스트리트 파이터’에 더 가깝다.
이들을 길거리 싸움꾼으로 격하하자는 게 아니다. 실체를 제대로 보자는 거다. 굳이 패권 추구의 속성을 설파해 유명해진 존 미어샤이머의 국제정치이론인 ‘공격적 현실주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최근 국제정치에 스포츠처럼 ‘싸움의 규칙’이란 게 존재하는가. 큰 틀의 국제질서 속에서 최소한의 체면치레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기존 질서를 타파하겠다는 트럼프 등장 후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낯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 문 대통령과 집권 세력을 보면 국제문제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원칙에 매달리거나 경직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 문 대통령의 대일(對日) 스탠스는 도덕적 우월감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러시아는 영공 침범을 했는데 청와대는 러시아 무관의 발언을 놓고 해석이 엇갈리다 대응 시점을 놓쳤다. 김정은이 ‘남조선 당국자의 자멸’이란 표현을 쓰면서 한미동맹을 갈라놓으려 하는데, 청와대는 9·19 군사합의 위반이 아니라고 한다. 이슈마다 한두 발씩 대응이 늦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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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게임. 더군다나 주변 정상들이 한결같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권투인 줄 알았는데 “킥복싱 아니었냐”며 발길질하는 게 좋든 싫든 지금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원칙주의 그 이상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