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여자오픈 트로피를 들어올린 이정은, 브라보 앤 뉴 제공
“집안이 부유하지 못해 골프를 너무 힘들게 쳤어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굉장히 힘들었어요.”
3일 끝난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직후 이정은에게 힘들었던 지난 세월이 눈앞을 스쳐가는 듯 했다. 대회 기간인 지난달 28일이 생일이었던 그는 두 발로 걸어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딸이 네 살 때 덤프트럭 기사로 일하다 30m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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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대회 때마다 손으로만 조작이 가능한 장애인 전용 승합차를 몰며 딸의 운전기사가 됐다. 정작 대회장에서는 딸에게 부담을 줄까 봐 주차장에서 기다렸다.
사고 전에 조기축구회 골잡이였을 만큼 운동신경이 좋았던 아버지는 딸의 권유로 탁구 라켓을 잡았다. “정은이가 이젠 아빠가 좋아하는 걸 해보시라고 권유하더군요.”
아버지는 2017년 전국장애인체육대회 탁구 남자 단체전에 출전해 은메달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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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여자오픈 우승 후 인터뷰를 사양한 아버지 이 씨는 “너무 큰 걸 해내서 가슴이 벅차다. 주인공은 정은이다. 난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다”고 말했다. 어머니 주은진 씨는 “딸이 미국에서 일정한 거처도 없이 숙소를 옮겨 다녀 변변한 반찬도 하나 못보내줬다”며 울먹였다.
현지시간으로 오후 10시가 다 돼 공식일정을 마친 이정은은 호텔 방에서 두 명의 매니저와 룸서비스로 초밥을 주문해 조촐한 축하 파티를 했다.
앞서 기자회견에선 “상금(100만 달러)으로 한국 라면을 먹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지난해부터 큰 대회를 앞두고는 1주일에 두세 번 먹던 라면에 콜라도 멀리하며 집중했다. 이정은은 “좋아하는 걸 끊고 뭔가를 하면 동기부여가 된다. 우승하면 라면부터 먹고 싶었다”며 웃었다.
공교롭게도 이정은의 US여자오픈 우승 스코어는 6언더파였다. 이정은은 “한국에서도 3라운드에 66타를 쳐서 우승한 기억이 있다. 6이라는 숫자는 러키 넘버다”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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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은 LPGA투어 상금 1위, 올해의 선수 1위에 나섰다.
한편 대회에 앞서 타이거 우즈의 전 코치 행크 헤이니는 “이름 모를 한국 이 씨의 우승을 점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결과적으로 적중한 셈이 됐다. 이정은은 “난 영어를 잘 몰라서 이 사건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