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 제덕동 일대 유물 출토
500여 년 만에 발견된 제포왜관 터. 1407년부터 1544년까지 왜와의 교역을 위해 설치된 곳으로 삼포왜관 가운데 유일하게 확인된 유적지다. 문화재위원회는 제포왜관 터를 경남도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권고했다. 부산박물관 제공
15, 16세기 조선과 일본의 자유무역지대였던 ‘삼포왜관(三浦倭館)’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제포왜관 터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한일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조선과 왜(일본)의 선린우호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경남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일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한 두류문화연구원은 “지난해 진행한 발굴조사에서 조선 초부터 사량진왜변(1544년)이 발발하기 전까지 운영한 제포왜관 터를 확인했다”고 12일 밝혔다.
제포왜관 터가 발견된 곳은 제덕만과 인근 냉이고개 사이에 위치한 7302여 m² 구역으로, 4층 규모로 조성된 대규모 계단식 지형이 확인됐다. 축대와 담장, 기단건물지 등 주거지 관련 유적뿐 아니라 당시 사용한 도자기와 기와 파편 등 수백 점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조선시대 왜관의 실제 유적지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7일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의 냉이고개. 서남쪽으로 제덕만이, 남쪽으로는 대규모 제포왜관 터가 아래에 놓여 있었다. 새 주둥이처럼 생긴 U자형 해안 마을인 이곳에는 500여 년 전 2500여 명의 왜인(倭人)이 집단으로 거주했다. 바로 제포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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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왜관은 말 그대로 일본인 집단 거주지였다. 일본 자료인 ‘중세왜인전(中世倭人傳)’에 따르면 1494년 제포왜관에는 347가구, 2500여 명의 왜인이 머물렀다. 같은 시기 부산포왜관은 453명, 염포왜관에는 152명에 머무른 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규모였다.
그간 제포를 비롯한 삼포왜관은 신숙주(1417∼1475)의 ‘해동제국기’(1471년)에 수록된 고지도 등에서 위치를 간접적으로 추정해 왔다. 나머지 부산포왜관과 염포왜관 터는 현대에 들어서 각각 부산진시장과 현대차공장 부지로 사용돼 유적지를 확인할 수 없다.
이날 동행한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은 “당시 조선 정부는 왜인들이 몰래 내륙으로 들어와 밀매를 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덕토성을 쌓고 왜관을 통제했다”며 “이번 발굴조사에서 ‘해동제국기’에 표시된 모습 그대로 제포왜관과 제덕토성, 감시초소 등이 대거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 “공단 위해 도로 개설” vs “역사관광자원 활용”
제포왜관 터에서 발견된 ‘대명정덕팔년춘조(大明正德八年春造·원 안)’라고 적힌 기와. 1513년 제작된 기와라는 뜻으로 학계에서는 당시 이곳에 지은 건물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류문화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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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해경제청 관계자는 “공단의 원활한 물류 수송을 위해 해당 지역을 왕복 6차선 도로로 조성할 계획이었지만 제포왜관이 발견돼 당혹스러운 게 사실”이라며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이청규 한국고고학회장(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은 “한반도에 남아있는 일본 관련 유적은 대부분 치욕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반면 제포왜관은 조선이 교역을 희망하는 왜에 토지를 할애하고, 건물을 조성한 유적지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진해=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