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시대, 노인 상대 고위험상품 추천 활개
“제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물론이고 정부 관계부처 고위직 분들도 모시고 있거든요.”
삼성전자 기술직으로 20년 이상 근무하며 꾸준히 회사 주식을 사모아 온 강모 씨(67). 강 씨의 자산관리를 돕던 A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는 그가 노후 대비용으로 수십 년 묵혀온 삼성전자 주식을 자꾸만 팔라고 권했다. 강 씨는 이를 몇 차례나 뿌리쳤지만 PB는 끈질기고 집요했다. 2016년 초에 보름 가까이 연일 전화를 걸어와 종목 교체를 권유하자 점차 강 씨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강 씨는 삼성전자 우선주 1200여 주를 팔고 그 대신 호텔신라 주식을 매수했다. PB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재차 전화를 걸어 강 씨의 배우자가 보유 중이던 한화 주식을 매도하고 삼성SDS 등으로 갈아타게 만들었다. ‘초저위험 투자형’인 강 씨 배우자의 투자 성향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 씨는 “증권사에 ‘면죄부’를 줄 수 없다”며 이 같은 조정 결정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 씨는 “노인들을 꼬드겨 괜히 주식을 사고팔게 만들고, 가운데서 수수료를 챙기는 증권사의 행태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 노년층 울리는 ‘불완전판매’
지난해 6월 말 기준 주가연계증권(ELS) 등 파생결합증권 발행 잔액 101조 원 중 개인투자자 투자금액은 47조2000억 원. 이 중 60대 이상이 투자한 금액은 41.7%에 달했다.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 보니 안정적인 투자 성향을 보이던 60대 이상 고령 투자자들도 대거 ELS 투자에 뛰어든 것이다.
문제는 복잡한 상품구조와 투자 위험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투자에 나서는 고령층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금융이해력 점수는 평균 62.2점으로 특히 70대(54.2점), 60대(59.6점)가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투자설명서를 읽고 계약서에 사인은 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상품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라며 “젊은 투자자들은 손실을 보더라도 계속해서 소득이 발생하니 이를 만회할 수 있지만 노년층은 노후자금에 손실을 볼 경우 바로 생활에 타격이 온다”고 지적했다.
주부 이모 씨(59)는 지난해 ‘중위험 중수익 상품’이라는 은행 직원의 추천에 당시 인기를 끌던 ‘양매도 상장지수증권(ETN)’ 상품에 가입하려다가 상품설명서 내 ‘최고위험’이라는 문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알고 보니 양매도 ETN은 지수가 일정 범위에서 움직일 때는 수익을 내지만 지수가 범위를 벗어나 급등하거나 급락할 때는 손실이 나는 복잡한 구조의 상품이었다.
○ 고령투자자 보호 규정 현장에선 잘 안 지켜져
이런 실버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근 들어 각종 제도가 잇따라 도입되고 있다. 고령투자자에 대한 보호제도에 따라 2016년부터 금융회사들은 고령투자자 전담창구를 마련하고 파생결합상품 투자를 권유할 때는 관리직 직원(지점장 또는 준법감시인)의 사전 확인을 거쳐야 한다.
또 2017년 도입된 숙려제도는 부적합 투자자나 70세 이상 투자자가 상품 구조 및 투자위험 등을 충분히 숙지하고 투자 결정을 할 수 있게, 금융투자 상품 청약 후 2영업일 이상 숙려기간을 투자자에게 주도록 하고 있다. 적합성 보고서 제도는 고령투자자에게 파생결합상품 투자를 권유할 때 권유 사유 등을 기재한 보고서를 반드시 작성해 제공토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회사들이 이런 제도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다 보니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다. 금감원이 지난해 미스터리 쇼핑(고객으로 가장해 서비스 평가)을 통해 ELS 등 파생결합증권 판매 실태를 점검한 결과 은행들은 고령투자자 보호와 관련된 항목들에서 대부분 낮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숙려제도(34.0점)와 고령투자자에 대한 보호제도(35.7점), 적합성 보고서제도(38.4점) 등은 100점 만점에 30점대의 ‘낙제점’을 받았다. 금융당국의 점검 결과 “예전에 ELS 투자해 보셨죠?”라며 투자 성향을 정확하게 확인하지도 않고 일단 판매부터 하고 보려는 은행도 적지 않았다.
금융회사들에 대한 감독도 중요하지만 고령자에 대한 금융교육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도영석 금감원 금융교육국 수석조사역은 “노년층 등 취약계층의 금융이해력을 높이기 위해 유관기관과 함께 경제·금융교육을 강화할 예정”이라며 “금융소비자들도 원금 손실 가능성 등 투자 위험에 더욱 각별히 유의해 달라”고 당부했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