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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만에… 잊혀져온 독립유공자 16인, 세상 밖으로 나오다

입력 | 2018-12-15 03:00:00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제22화>용인-머내여지도




경기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과 동천동 일대 주민 300여 명이 3월 24일 ‘3·29 머내 만세운동 기념 걷기대회’가 진행된 가운데 낙생저수지 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하며 기념 촬영을 했다. 3·29 머내 만세운동 기념행사 준비모임 제공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도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16명을 새로 찾아냈습니다. 경기 용인시 수지 지역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태형 90대를 선고받았지만 증빙 기록이 없어 잊혀져 온 애국지사들입니다.”

이달 초, ‘머내여지도’라는 지역 소모임 단체가 동아일보에 이런 내용의 제보를 해왔다. 3·1운동 관련 공공기관도 아니고 전문 연구 단체도 아닌 마을 공동체 모임이 무려 16명의 숨은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했다는 거다.

모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도 포상 대상이 되는 유공자들이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까지는 3개월 이상의 형, 혹은 태형 90대(1대를 하루 수형으로 계산) 이상의 선고를 받은 독립운동가들만 포상 대상으로 선정했다. 그러다 올 4월 기준을 완화해 옥고 기간이나 태형 수에 관계없이 활동 내용을 심사해 포상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기자는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있는 머내여지도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오유경 대표는 “머내여지도는 2016년 9월 머내(용인시 수지구 동천동과 고기동의 옛 지명) 지역의 역사와 지리를 탐구하기 위해 10명의 주민이 모여 만든 모임”이라고 소개했다. 이름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 따왔다. 머내 지역의 여지도, 즉 머내여지도라는 ‘아마추어 향토사 연구 모임’이 어떻게 ‘독립유공자 발굴’까지 하게 됐을까.



○ “마을 역사가 우리를 초대해”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처음에는 난개발이 심한 이 지역에서 원주민과 이주민이 땅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고 수도권의 베드타운이 아닌 역동적인 삶의 공간으로 마을을 가꿔 보려 노력하기 위해 활동을 시작했다. 작년에는 경기문화재단이 주관하는 ‘보이는 마을’ 사업에 선정돼 1000만 원을 지원받게 됐다.

모임이 만들어진 이후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을 연구를 해오던 회원들은 ‘거금’을 마련하자 본격적으로 마을의 역사와 지리를 파고들었다. 소수만 남아 있는 원주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난개발 이전의 마을 옛길을 발견했다. 이어 머내 지역에서 3·1만세운동이 전개됐다는 뜻밖의 사실도 알게 됐다. 더욱이 만세운동 당시 일본 군경에 의해 2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적잖은 주민이 옥고를 치렀다는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마을이 교과서에서나 배웠던 3·1운동의 현장이라는 게 마냥 놀라웠어요. 마을 역사를 기록한 ‘수지읍지(誌)’에는 1919년 3월 29일 발생한 머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과 함께 이 지역 출신 16명이 태형 90대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고 언급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일이 이름까지 기재된 분들이 국가로부터 아무런 훈·포장도 받지 못한 거예요. 시간이 흐를수록 용인 지역 독립운동사에서조차 잊혀져 가는 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늦게나마 우리 주민이 나서서 그 후손들과 관계자의 증언을 들어 기록으로 남기고, 나아가 정당한 대우를 받게 해드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섰어요.”

머내여지도 회원이자 3·29 머내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을 맡고 있는 김경애 씨의 말이다. 그는 8년 전 자녀 교육을 위해 이곳으로 이사 온 평범한 주부다. 머내 지역과 특별한 연고도 없던 그가 지금은 아이들로부터 “엄마가 이제 안 해도 되잖아”라는 말까지 듣는 열정적인 마을 활동가로 변신했다. 그는 마을 역사가 던져주는 무언의 메시지에 강하게 이끌렸다고 한다. 마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아이들이 가슴에 안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자녀 교육이라는 깨달음도 있었다.

그러나 비전문가 모임이 머내 3·1운동사를 추적하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 지역에 대한 독립운동사는 일제의 재판 기록(이덕균 1심 판결문·1919년 4월 29일)에 간략히 언급돼 있을 뿐이다.

공식 기록에 근거한 머내 만세운동은 당시 용인군 수지면 고기2리 샛말(현재 광교산 중턱)의 구장(이장 격) 이덕균과 고기1리 손기마을 주민 안종각의 주도로 시작됐다. 안종각이 만세운동을 제안하면서 태극기를 준비하자, 구장이자 마을 훈장이던 이덕균이 적극 호응해 시위가 본격화됐다.

1919년 3월 29일 오전 9시경, 이덕균은 집집마다 1명씩 대표로 나온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가두 행진을 벌였다. 고기리 주민 100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 행렬은 동막리, 동천리, 풍덕천리를 지나면서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다시 수지면사무소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시위대가 1000여 명이 됐다. 시위대는 기세를 몰아 군청과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는 읍삼면사무소(이후 구성면사무소)로 나아갔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일본 헌병대 총부리 앞에서 시위 행렬은 멈추고 말았다. 여기서 만세운동 주동자인 안종각과 최우돌이 일제의 총격에 의해 현장에서 절명하고 참가자들이 무더기로 붙잡혔다. 일제는 이후 구장 이덕균을 체포해 1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공식 기록은 이게 전부다.



○ 독립운동가 후손 찾기

머내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고기리 구장 이덕균의 손자 이석순 씨(오른쪽에서 세 번째)와 김창희 경기동부보훈지청 혁신자문단 위원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4일 만세운동이 시작된 고기초등학교 앞에서 머내여지도 회원들과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용인=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고기리의 궁벽진 산골 동네에서 시작한 머내 만세운동은 그렇게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99년의 세월이 흐른 후, 머내여지도 회원들이 머내 만세운동의 뼈대에 살과 피를 더하는 스토리 작업을 하면서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그들은 일제 판결문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태형을 선고받은 독립운동가 16명의 후손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회원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이달까지 4명의 후손을 찾아내 인터뷰까지 마쳤다. 김경애 씨는 독립운동가 홍재택(1870∼1951)의 손자 홍봉득 씨(86·서울 거주)를 만나 기록으로는 접할 수 없는 증언을 들은 게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고 말했다.

홍 씨에 따르면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집안 출신의 홍재택은 ‘궁술대회’라는 친목 모임 등을 개최해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한 힘을 길렀다. 이윽고 인근 지방에서 일어난 3·1 항쟁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만세운동을 결심했다. 이웃인 안종각과 함께 구장 이덕균을 설득하는 한편 동리마다 만세운동에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일경과의 물리적 싸움을 대비하는 준비까지 갖추었다. 말하자면 머내 만세운동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벌인 ‘거사’였다는 것이다. 거사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인 홍재택은 만세운동 후 일경의 검거를 피해 집으로 몸을 피했다가 이튿날 새벽 체포됐다.

“할아버지는 일제의 고문에 이어 태형 90대를 맞고서는 엉덩이 살이 터져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지경이 됐습니다. 동네 주민들이 이불에 싸서 족운(가마)에 태워 겨우 집에 모셔올 수 있었어요. 만세운동 후 할아버지는 일제의 특별감시 대상이 됐어요. 1945년 광복이 되기 3개월 전인가, 할아버지는 75세이셨는데 일경이 찾아와서는 낮에 술을 드셨다고 트집을 잡으면서 욕을 하고 말채찍으로 정수리를 후려쳤어요. 나는 그걸 보고 너무 놀랐지만 할아버지는 미동도 않고 태연하셨습니다. 그날 밤 할머니한테서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 그 왜경이 조선인이었는데 동족 간에 그런 꼴을 보는 할아버지 심정이 오죽하셨을까….”(홍봉득 씨 녹취록)

증언하는 홍 씨의 눈은 붉게 물들었고, 그 말을 듣는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홍 씨는 조부의 나라 사랑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자식과 손자들의 생일을 모두 3·1절(3월 1일)과 광복절(8월 15일)에 맞춰 호적에 올렸다고 말했다.

고기리 구장을 지낸 이덕균의 손자 이석순 씨(74)의 증언도 가슴을 아프게 했다. 현지에서 지금도 거주하고 있는 이 씨는 기자와도 만났다.

“할아버지는 만세운동을 스스로 입에 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독립운동을 했지만, 일제 치하에서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탄압받은 게 드러내놓고 자랑할 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저는 훗날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가 만세운동 때 쓰고 가셨던 남바위(일종의 방한모)에 총알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후 독립운동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서 당시 만세운동을 함께한 분들의 후손들에게 연락도 해봤어요. 그런데 만나자고 해도 만나주는 사람이 없었고, 선대가 3·1운동을 한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대체로 사는 형편이 좋지가 않아요.”

당시 한 집에 한 명꼴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고기리 사람들은 농부가 대다수였다고 한다. 회원 김효경 씨는 독립운동가 후손 인터뷰 작업에 참여하면서 “나도 농사짓는 사람으로서 농부인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3월 29일 무렵은 겨우내 곡기에 굶주린 농군들이 퇴비를 져 나르는 등 한 해 농사 준비에 한창 몸과 마음이 바쁠 때다. 더욱이 이미 한 달 가까이 진행된 이웃 지역의 만세운동을 보며 시위에 가담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농사를 밀쳐놓고 목숨을 건 행진에 나섰다. 만세운동 후 집집마다 모진 태형을 받고 몸을 가누지 못하던 가장들은 그해 씨앗을 제때 뿌리지 못해 한 해 농사까지 망쳐버려 ‘가난한 입’들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 기적같이 등장한 ‘범죄인 명부’

경기 용인시 수지구청 문서고에서 발견된 일제강점기 시절의 ‘범죄인 명부’. 독립운동가 16명의 형량, 직업, 주소 등이 상세히 적혀 있어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을 수 있는 자료가 될지 주목된다. 경기동부보훈지청 제공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독립운동가 후손 찾기와 인터뷰 외에도 바쁘게 움직였다. 3월 24일에는 당시 머내 지역인 동천동과 고기동의 주민 300여 명이 참여한 ‘3·29 머내 만세운동 기념 걷기대회’(연출 감독 정필주 회원)를 열어 독립만세 행렬을 재현했다. 머내여지도 회원들이 당시 판결문과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세 행렬 길을 찾아냈던 것.

이 행사 즈음에 반가운 소식이 찾아왔다. 경기동부보훈지청(지청장 박용주)에서 머내여지도 팀에 연락을 해왔다. 3·29 머내 만세운동 걷기 행사에 관심을 보인 양진건 보훈팀장은 “정부가 해야 할 일에 민간단체가 직접 나서서 고마울 따름”이라면서 미포상 독립운동가 16명을 발굴하는 데 함께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공공기관의 지원 없이 활동하던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용기를 얻었다.

그간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태형 선고를 받은 16명의 공식 기록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회원들은 일제강점기 때 16명의 관할 구역이 수지면사무소였던 만큼 수지면사무소를 승계한 수지구청에 형사기록이 보관돼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보훈지청과 수지구(구청장 정해동)가 머내여지도 회원들의 노력을 전해 듣고 적극 협력에 나서면서 일이 일사천리로 풀려 나갔다.

11월 14일 수지구청 문서고에서 ‘범죄인 명부’가 확인했다. 놀랍게도 일제강점기 때 작성된 1000쪽가량의 수기(手記) 범죄인명부에 머내 만세운동에 참여한 16명이 ‘보안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고스란히 기재돼 있었다. 용인헌병분대가 ‘태 90’이라는 즉결 처분을 내렸으며, ‘범죄자’의 직업, 연령, 주소도 적혀 있었다.

현재 머내 만세운동으로 국가의 포상을 받은 이는 이덕균, 안종각 단 2명뿐이다. 이번 ‘범죄인 명부’ 발견으로 16명의 미포상 독립운동가와 3·29 만세운동 당시 현장에서 순국한 또 다른 인물인 최우돌도 포상을 받을 길이 열렸다. 머내여지도 회원으로 경기동부보훈지청 보훈혁신자문단 위원장인 김창희 씨의 말.

“이번에 홍재택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16명에 대한 공적 기록이 발견돼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을 길이 열렸습니다. 소중한 기록이 지역공동체인 민간단체, 국가 기관, 지자체의 공동 노력으로 세상에 드러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기자는 머내여지도 회원들과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만세운동 길을 걸어보았다. 만세운동 발상지인 고기초등학교(수지구 고기동)를 방문했다. 그러나 만세운동과 연결되는 곳이라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이곳을 비롯해 중요한 지점에 머내 만세운동 표석을 세우는 등 또 다른 과제 해결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달 12일 드디어 경기동부보훈지청, 용인시 수지구와 기흥구, 머내여지도,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원장 한시준) 등 단체가 공동으로 ‘용인 3·29 만세운동 독립유공자 포상’을 국가에 공식 신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용인에서 한 민간단체의 열정이 3·1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는 결실을 맺은 것이다. 표석 세우기나 유공자 지정 및 포상도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용인=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