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형 에너지저장장치(ESS)가 ‘중소기업 간 경쟁제품’으로 지정되면서 향후 공공분야 발주량의 80% 이상엔 대기업이 입찰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ESS는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시스템으로 고성장이 예상되는 미래 산업 먹거리 중 하나다. 하지만 중기 간 경쟁제품 지정으로 “외국산에 시장을 잠식당한 발광다이오드(LED) 사태와 동일한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달 5일 중소벤처기업부는 ESS를 중소기업 간 경쟁제품으로 지정했다. 다만 대기업의 피해를 줄인다며 전력변환장치(PCS) 용량이 250kW 이하인 제품만 중소기업이 맡고, 그보다 큰 제품은 대기업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중기부는 “2017년 조달청 및 한전이 조달한 PCS 중 250kW 이하는 금액 기준으로는 5%(32억 원) 정도에 불과하다”며 “250kW 이하의 관수(官需) 물량이 적기 때문에 대기업의 피해는 미미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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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력시장에선 태양광, 풍력 등 친환경 신재생에너지는 생산이 불규칙적이기 때문에 에너지를 저장해 두는 ESS의 중요성도 함께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세계 ESS 발전량은 올해 6.9GWh(기가와트시)에서 2025년 90.4GWh로 연평균 45%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국내 공공시장 진입 제한으로 대기업들이 제대로 경쟁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ESS 업계 관계자는 “공공 물량을 통한 레퍼런스 축적이 해외시장 진출의 발판이 되는데 그 기회까지 꺾이게 되는 셈”이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LED와 똑같은 꼴이 날 것”이라는 날 선 비판도 제기된다. 신산업으로 주목받았던 LED 조명사업은 2011년 동반성장위원회에 의해 중기적합업종으로 선정되면서 레퍼런스를 확보하지 못한 삼성전자, LS산전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철수했다. 그 빈자리는 국내 중소기업이 아닌 필립스, 오스람 등 외국계 기업이 과점하고 있다.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정책이 오히려 중소기업 및 중견기업에 역피해로 이어질 소지도 있다. ESS에 들어가는 부품들은 중소, 중견기업에서 납품받는 경우가 많다. ESS 사업을 진행하는 국내 A기업은 2015∼2018년 ESS 부품 재료비에서 중소기업 공급비율이 91%에 달했다.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시공업체들의 불만도 크다. 1만7000여 개의 시공업체를 회원사로 둔 한국전기공사협회 관계자는 “중기 간 경쟁제품으로 선정되면 ESS 부품을 직접 생산하는 업체만 공공기관 입찰에 참여할 수 있어 ESS 설치사업을 하는 시공업체들은 입찰 참여 기회조차 없다”고 말했다.
김재희 jetti@donga.com·황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