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건 사회부장
“통계만 있으면 무엇이든, 심지어 진리까지 입증할 수 있다.” 독일 문단의 교황으로 불린 문학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생전에 한 말이다(‘통계의 함정’ 발터 크레머 등). 통계로 끌어낼 수 있는 믿음이 무한하다는 의미다. 뒤집으면 통계에 의심이 갈 경우 진리도 믿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지금 한국 정부가 그런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통계청장이 소득 분배 수준 등을 파악하는 가계 동향 조사 결과가 좋게 나오도록 통계 기준을 잡지 않아서 경질됐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통계 조작은 역사에 대한 범죄”라며 청와대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논란은 여전하다.
앞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권의 제국국민계몽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통계 조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비서를 지낸 브룬힐데 폼젤은 지난해 숨지기 전 언론 인터뷰에서 전사한 독일 병사 수는 줄이고 러시아군에게 성폭행당한 독일 여성 수는 부풀리는 등 통계를 조작했다고 털어놨다.
“나는 내가 조작한 통계만을 믿는다.”
또 괴벨스는 2차대전 적국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이 이렇게 언급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 처칠은 당시 통계부를 만들어 전황을 상세히 보고받았다. 통계가 국민 사기와 체제 안정의 관건이라고 처칠과 괴벨스 둘 다 명확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이렇게 정치에 이용당하고 권력에 취약한 게 통계의 숙명이다. 그래서 최근 통계청장 교체가 뜨거운 정치 이슈로 부상한 것이다.
그런데 법원은 재판 거래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 중 11%만 발부했다. 일반 사건 발부율은 99%다. 법원은 자신에 대한 수사를 방해한다는 의심까지 받게 됐다. 의심에 의심이 쌓이면 깔보이게 된다. 이미 자력구제의 유혹이 번지고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국가의 3권, 행정 사법 입법부 모두 신뢰의 위기에 처했다. 뭘 믿고 어디로 가야 하나. 존 롤스는 저서 ‘정의론’에서 완전하게 공정한 절차를 만드는 조건으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개념을 제시했다. 모두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에게 유리한 원칙을 만들 입장에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실에 없는 이상적 조건이다.
하지만 행정 사법 입법부는 이 베일을 써야 한다. 통계 기준, 재판 절차, 가치와 이익 분배의 원칙을 누구에게도 유리하지 않게 싹 바꾸는 걸 실행해야 한다.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그래야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기대할 수 있다.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