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 김지은 성폭행 사건의 실체는 셋 중 하나다. 14일 나온 1심 판결대로 불륜이거나, 아니면 김 씨 주장대로 성폭력일 수 있다. 김봉수 성신여대 법학과 교수는 ‘김지은이 진실해도 안희정은 무죄일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김 씨는 위력이라고 느꼈지만 안 전 지사는 위력을 사용하지도, 그에 대한 고의가 있지도 않았을 가능성이다. 김 교수는 “사건의 진실은 당사자도 정확하게 모를 수 있다”며 “각자 편견에 따라 당연히 성폭력이다, 불륜이다,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안 전 지사는 처음부터 유죄였다. 수행비서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인정했으니 도덕적으론 유죄 맞다. 하지만 판결이 확정되기도 전에 성범죄자로 단정하는 건 다른 문제다. 모든 형사 사건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헌법 27조 4항)이 적용되는데 유독 성폭력 사건은 여론재판에서 ‘유죄 추정의 원칙’을 따른다. “당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순간 끝난다. 재판을 받아볼 필요도 없다. ‘피해자’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에 쉽게 가려진다.
유죄 추정의 원칙은 마녀 사냥의 다른 이름이다. 덴마크 영화 ‘더 헌트’는 2012년 개봉작이지만 미투 운동의 부작용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주인공 루카스는 유치원의 유일한 남자 교사다. 어느 날 여자아이가 루카스에게 기습 뽀뽀를 하고 루카스는 “뽀뽀는 엄마 아빠하고만 하는 거야”라고 주의를 준다. 무안함에 화난 아이는 유치원 원장에게 말한다. “루카스 선생님 싫어요. 고추도 달렸고요.” 원장은 “아이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며 루카스를 아동 성추행범으로 단정하고, 다른 아이들도 어른들의 유도 질문에 “미투” 한다. 루카스는 경찰에서 혐의를 벗지만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사냥감’이 된다.
한국의 루카스, 제2의 시인 박진성이 계속 나온다면 용기 있는 여성들이 어렵게 불을 지핀 미투 운동이 지속될 수 있을까. 미투가 성폭력이 만연한 일상을 바꾸려면 성폭력 혐의자에게도 무죄 추정의 원칙을 인정해야 한다. 평소 몸가짐이 단정한 남자든 손버릇 나쁘기로 소문난 난봉꾼이든 마찬가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 ‘휴먼연대’의 문제 제기를 들어보자. “언론을 통해 일거에 상대방을 매장시키는 미투 방식은 유효한가? 관련 언론의 책임은? 강력한 변호인단을 구성한 안 전 지사와 달리 다수의 가난한 이들은 성범죄자라는 혐의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