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1926~2018]파란만장했던 43년 정치 역정
박정희 옆에 JP 박정희 전 대통령(앞줄 오른쪽)이 1962년 1월 20일 서울 태평로 국회별관에 있는 중앙정보부를 시찰하고 있다. 당시 초대 중정부장이던 JP가 박 전 대통령과 나란히 앉아 보고를 받고 있다.
○ 5·16 주역이자 초대 중정부장
JP는 1967년 7대 국회로 재입성했다. 4년 뒤에는 국무총리로 다시 2인자에 화려하게 돌아와 4년 6개월을 지냈다. 박정희식 개발 모델의 최전선에 선 것이다. 1979년 10·26사태 직후 공화당 총재를 맡았지만 신군부에 의해 ‘부패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낭인 생활을 해야 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JP는 DJ, YS와 함께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 11, 12대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1987년 민주화의 열기로 치러진 13대 대선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1988년 13대 총선 때 신민주공화당으로 충청권을 석권한다. 그러고는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 민주당 총재이던 YS와 3당 합당에 참여해 1992년 대선에서 YS 당선에 기여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초 YS 민주계로부터 “정치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았다. JP는 결국 같은 해 3월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 창당으로 정면승부를 건다. JP의 자민련은 그해 6월 지방선거에서 이른바 ‘핫바지론’ 하나로 충청권을 휩쓸고, 1996년 15대 총선에서도 충청권에서 24석을 포함해 총 50석을 얻으면서 정국의 캐스팅보터로서 자리매김한다.
○ ‘DJP연합’으로 첫 정권교체
제1차 외유 JP(오른쪽)가 1963년 2월 25일 부인 고 박영옥 여사, 딸 예리 씨와 김포공항에서 ‘자의 반, 타의 반’ 발언으로 유명해진 제1차 외유를 떠나고 있다.
그러나 DJ와도 결별하게 된다. 2001년 ‘햇볕정책 전도사’인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에 자민련이 찬성하면서다. JP가 요구해온 내각제 개헌이 무산된 뒤 DJP연합이 흔들리던 와중에 JP가 임 장관 해임건의안에 찬성하자 DJP연합이 파경을 맞은 것이다.
대일 청구권 담판 1962년 11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JP가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만나 대일 청구권 협상을 위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회동 후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작성했다. 운정재단 제공
그러나 총선 직전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공동 추진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뒤늦게 가담했다가 역풍을 맞아 4석으로 쪼그라든다.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조차 낙선하면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총선 패배 직후인 2004년 4월 19일 그는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면서 나름대로 재가 됐다”며 정계 은퇴를 전격 선언했다. 5·16군사정변으로 한국 정치사에 등장한 그가 43년간의 정치인생을 접은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4·19혁명 44주년 기념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