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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전 ‘2·8독립선언’ 외쳤던 곳엔 기념푯말 하나 없어

입력 | 2018-03-03 03:00:00

[토요판 커버스토리/1919~2019,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지난달 8일 일본 도쿄의 재일본한국YMCA 회관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 제99주년 기념식. 독립운동가 김구의 손자 김휘 씨(앞줄 오른쪽), 김규식의 손녀 김수옥 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도연의 손자 김민희 씨(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등 유족, 광복회 회원, 한국과 일본의 YMCA 관계자들이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도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 추적 탐방은 일본 제국주의 심장부였던 일본 도쿄(東京)에서 시작됐다. 3·1운동 관련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도 함께했다.

올 2월 8일 오전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재일본한국YMCA 회관. 머리가 허옇게 센 노령층부터 교복 차림의 앳된 학생층에 이르기까지 250여 명의 재일 한국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의 ‘손님’들도 바다를 건너 참석했다. 국내 3·1운동의 불꽃을 지핀 도쿄 2·8독립선언의 주역인 김도연(이하 존칭 생략)의 손자 김민희 씨, 한국인의 독립 선언과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달려간 김규식의 손녀 김수옥 씨, 3·1운동과 함께 출범한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의 손자 김휘 씨와 나창헌의 아들 나중화 씨(광복회 부회장), 일본군 수뇌부에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의 손녀 윤주경 씨(전 독립기념관장), 대일 무력항쟁을 이끈 광복군 지대장 김학규의 아들 김일진 씨,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민족기업가 안희제의 손자 안경하 씨, 항일 민족 언론인 양기탁의 손자 양준영 씨 등이 바로 그들.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애국지사 집안의 경력은 마치 일제하 치열했던 독립운동사를 압축적으로 나열해 놓은 듯했다.

행사는 정확히 99년 전인 바로 이날, 한국인 유학생들이 적국(敵國)의 수도 한복판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불법 점령을 거부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2·8독립선언)한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기념식은 장엄하게 진행됐다. 애국가에 이어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금세 애국지사 유족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국의 땅에서, 그것도 한국인으로서는 감정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일본 땅에서 우리 국가와 아리랑을 듣는 감회는 남다른 듯했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한 부친 때문에 상하이가 출생지인 나중화 광복회 부회장은 “일제하 지난한 세월을 보냈던 어른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김수옥 씨는 “나와 같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는데,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노래를 들으니 가슴이 벅찼다”고 말했다. 다른 유가족들도 서로 강한 유대감을 느끼는 듯했다.

기념식을 치른 재일본한국YMCA 회관 앞에는 태극기와 함께 ‘조선독립선언기념비(朝鮮獨立宣言記念碑, 1919 2·8)’라는 한문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당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자리가 아니다. 원래 터는 옛 주소로 ‘도쿄 간다(神田)구 니시오가와(西小川)정 2-5’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때 불타버리는 바람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것이다.

기자는 2·8독립선언 기념식을 참관한 후 도보로 원래 터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YMCA회관 내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의 다즈케 가즈히사(田附和久) 실장은 “옆으로는 정면에 센슈(專修)대가, 오른쪽에 강이 있었다”는 당시 증언과 관련 사진, 지도 등을 토대로 현재의 회관에서 서남쪽으로 700m 남짓 떨어진 지점 ‘니시간다(西神田) 3초메(三丁目) 3번지 골목’을 지목했다.

1907년 당시의 지번이 새겨진 고지도와 현대 지도를 들고 홀로 찾아갔다. 10분 거리밖에 안 되는 이곳을 찾기 위해 30분간 헤맸다. ‘다이요빌딩’, ‘니시간다YS빌딩’ 등 중소규모 빌딩들이 자리한 곳이었다. 다즈케 실장은 “그 일대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 있었던 곳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로가 개설되는 등 지형이 워낙 변해 정확한 건물 위치를 콕 집어 찾아내기는 어려운 상태”라고 밝혔다.

99년 전 바로 이 일대에서 재일 유학생 600여 명이 “이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 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期成·꼭 이루기를 기약)하기를 선언하노라” 하며 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 그러고선 일본 형사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며 질질 끌려갔다.

지금은 그때의 장면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245m²(약 74평) 규모의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이었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온데간데없다.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사이, 역사의 현장은 완벽하게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해 버렸다.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기억될 이 현장을 기념하는 푯말 하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또다시 세월이 흐르면 한국인의 기억에서도 완전히 지워질지 모를 일이다.

도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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