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3·1절 99주년]신규식-김규식 독립청원서 확인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신규식, 김규식에 의해 프랑스어로 작성된 독립청원서(왼쪽 사진). 중국 상하이 망명 당시의 신규식(가운데 사진 실선 안)과 신채호, 신석우(왼쪽부터). 오른쪽 사진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실선 안)과 사무 보조원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도서출판 역사공간 제공·동아일보DB
나중에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우사(尤史) 김규식(1881∼1950)은 중국 상하이에서 급하게 조직된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파견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신한청년당 설립을 주도한 여운형이 외국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대표로 선정했고, 1918년 11월 상하이에서 장덕수 등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후 파리로 떠나는 김규식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규식은 여운형이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독립청원서에서는 신한청년당 대신 한국독립공화당(The Korean Republican Independence Party)이라는 새 이름이 등장했다.
청원서의 내용 전개도 여운형의 독립청원서와 구조가 다르다. 3·1운동 발발 전후로 작성된 여러 종류의 독립청원서들은 대개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 일제의 부당한 합병,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서술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이번에 확인된 독립청원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이 같은 연합국의 일원인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매우 경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니 미국이 주도하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 ‘영구적 세계평화’의 정신에 입각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호소였다.
또 청원서에 총재(President)로 등장하는 신규식(1880∼1922)은 독립 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베일에 싸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카이저수염으로 유명한 신규식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죽음으로 항거하려 극약을 마셔 자결을 시도했으나 가족들에게 발견됐고 그 일로 오른쪽 눈이 상했다. 그는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본다’는 의미의 예관(睨觀)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1912년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동제사’를 설립해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다. 동제사는 해외 각지의 정보를 수집해 국내에 전달해 국내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등 정보기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따라서 이번에 발견된 독립청원서는 김규식과 더불어 신규식과 동제사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직접적 단서라고 할 수도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은 “3·1운동은 예관(신규식의 호)에 의해 점화됐다”고 말한 바 있다.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는 최근 연구논문 ‘1919년, 파리로 가는 김규식’에서 김규식과 신규식 인맥이 매우 정교한 기획과 준비작업을 거쳐 시간 안배를 적절하게 하면서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게 확인된다고 기술했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알려진 것처럼 김규식이 단지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신한청년당 대표로 선출돼 수동적으로 파리에 파견된 것이 아니라는 게 정 교수의 해석이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