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화재 현장에 놓인 추모 국화.
A 씨(35)와 두 딸(15, 12세)이 서울 종로구 서울장여관에 묵은 건 19일 오후였다. 이날은 세 모녀 여행일정의 5일째였다. 15일 전남 장흥의 집을 떠났다. 수도권과 서울 등을 둘러본 뒤 21일 귀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참변에 결국 세 모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다.
가정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A 씨와 남편(40)은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도 미처 올리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3월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생활비 긴급지원을 신청하기도 했다. 형편은 어려웠지만 가족 사랑은 각별했다. 이번에도 겨울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안겨주기 위해 A 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출발했다. 남편은 “생활비를 벌겠다”며 함께하지 못했다.
세 모녀도 여행비를 아끼기 위해 가장 싼 숙소를 찾았다. 그렇게 찾은 곳이 불이 난 여관이었다. 한 주민은 “세 모녀 소식을 듣고 너무 안쓰러워 지인들이 얘기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흥군은 A 씨 가족에 대한 긴급지원을 준비하는 한편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돕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주로 일용직 근로자였던 장기 투숙객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의류업체에서 일하는 최모 씨(52)는 화재 당시 2층에서 뛰어내려 다행히 가벼운 부상에 그쳤다. 3개월가량 여관에 머물렀다는 최 씨는 “회사에 가려고 일찌감치 일어났었다. 덕분에 불이 난 걸 알고 재빨리 대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건물 맨 안쪽 방에 있다가 살아난 박모 씨(58)는 약 3년간 여관에 투숙 중이다. 그는 종로의 한 양복점에서 옷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때그때 일감이 있으면 돈을 버는 일이다. 수입이 일정치 않다보니 한 푼이라도 싼 숙소를 찾아 이곳에 머물고 있다.
한 부상자 가족은 “상태가 좋지 않아 아직도 마음이 불안하다. 연기를 많이 마신 일부 부상자는 뇌 손상도 우려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장흥=이형주기자 peneye09@donga.com
김은지기자 eun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