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리처드 플래너건 지음/김승욱 옮김/544쪽·1만5500원·문학동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태국∼미얀마 간 철도 건설을 소재로 한 영화 ‘콰이강의 다리’.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의 배경과 같다. 포로들은 광기가 몰아쳤던 당시를 ‘라인’이라 불렀다. 소설의 주인공 도리고는 “세상의 인간은 ‘라인 위에 있던 인간’과 ‘그렇지 않은 나머지 인간’ 두 종류뿐이다”며 고통스러워한다. 동아일보DB
이야기는 일본군 포로로 태국∼미얀마를 잇는 ‘죽음의 철도’ 라인에서 참상을 겪었던 청년 도리고와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후 명성을 얻어 존경을 받는 70대 도리고의 현재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 도리고가 고모부의 새 아내 에이미와 은밀하게 나눈 사랑도 비중 있게 그렸다.
비가 쏟아지는 정글에서 벌거벗다시피한 채 나무를 베어내고 철도가 들어설 길을 닦는 포로들. 공사 기일을 맞추기 위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극한의 작업에 내몰린 이들은 온갖 질병에 걸려 수없이 죽어나간다.
도리고는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자신을 향한 칭송에 “미덕은 잘 차려입고서 갈채를 기다리는 허영이었다”고 건조하게 내뱉는다. 그는 공개석상에서는 위스키에, 비밀스러운 곳에서는 여자에 탐닉하는 남자일 뿐이기에.
에이미와 함께한 격정의 순간과 사회적으로 성공한 도리고의 현재 모습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였던 철도 공사 현장의 비극을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군인에게 구타당하는 포로를 보며 다른 이들은 동료가 죽든 매질이 끝나든 어느 쪽으로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전에는 저녁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끔찍한 장면들을 묘사한 전쟁소설이지만 감정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도록 자극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세상과 삶은 모순덩어리임을 시종일관 담담하게 써내려갈 뿐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볼 때 목이 칼로 자르기 쉬운지 어려운지부터 파악하는 고타 대령은 나카무라 소령과 함께 밤이면 일본 시 하이쿠를 읊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살기 위해 일본군 밑에서 부역한 조선인 최상민은 전쟁이 끝나자 처형된다. 반면 고타와 나카무라는 처벌을 받지 않은 것은 물론, 선(禪) 명상가가 되고 노인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는 봉사활동을 하며 ‘착한 사람’으로 지낸다.
전쟁의 기억은 도리고를 끝없이 철도 공사 현장으로 데려다 놓는다. 작가는 전쟁으로 상징되는 상처가 인간에게 어떤 자국을 남기는지를 응시한다. 그리고 말한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