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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완창을 왜 하냐던 시절, 동아가 무대 열어줬죠”

입력 | 2017-12-18 03:00:00

[나와 동아일보]<3> 안숙선 명창




“파마머리 했더니 스승님 말씀이…”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로 불리는 명창 안숙선이 1970년대 중반 계곡에서 소리 공부를 하는 모습. 당시 유행하던 파마머리를 했을 때 그는 스승인 박귀희 선생으로부터 “노래만 잘하면 무슨 소용이냐”며 몸가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동아일보DB

“서울로 오너라. 한번 보자.”

전북 남원에서 소리 공부를 하던 내가 열아홉 살 때 만정(晩汀) 김소희 선생님(1917∼1995)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창(國唱)으로 불렸던 만정 선생님이 누군가. 소리 하는 사람들에겐 언감생심 곁에 갈 수도 없는 분이다. 나는 완행열차를 타고 동생과 함께 상경해 자취를 하며 만정 선생님을 어머니처럼 의지하고 살았다.

가야금 병창의 스승이신 향사(香史) 박귀희 선생(1921∼1993)도 집에까지 찾아와 시어머니와 남편을 붙잡고 “소리 공부를 포기하지 않도록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엄하고 따뜻한 스승들의 가르침 덕에 비로소 소리꾼이 내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당시 국악계 어르신들은 동아일보와 깊은 친분 관계를 갖고 있었다.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 대부터 국악계를 후원해 온 오랜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2년부터 동아일보가 주최해 온 명인명창 무대에는 김소희 박귀희 박초희 명창과 이매방 선생님을 비롯한 내로라하는 당대 명인들이 총출연했다. 말단 제자였던 나도 스승님을 따라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을 몇 번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1984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김소희 선생님의 판소리 53년 인생을 마감하는 은퇴 공연이 동아일보 주최로 열렸다. 당시 1면에 사고와 인터뷰 기사도 큼지막하게 실렸다. 당시 공연에서 제자인 신영희 선배님과 나도 함께 ‘춘향가’를 불렀다.

내가 소리꾼으로서 스타가 된 결정적 계기는 1989년부터 동아일보와 국립극장이 함께 주최한 ‘완창 판소리’ 무대였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1년에 열두 번 하는 완창 판소리는 장안의 화제였다. 3시간에서 8시간이 걸리는 완창 판소리에 대해 처음에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긴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연 전에 국문학과 교수님들이 먼저 ‘완창은 왜 하는가’ ‘작품 해설’ 등을 강의하곤 했다. 나는 이 무대에서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춘향가 등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완창했다.

판소리 완창을 하려면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남산 자락의 국립창극단에서 완창 판소리 공연을 앞두고 밤새워 소리 연습을 하고 있는데, 경비원이 야간 순찰을 돌다 귀신 소리가 나는 줄 알고 기겁했다는 소문도 났다. 당시 소리 하는 사람들은 동아일보의 완창 판소리 무대에 서는 것을 필생의 소원으로 삼았다.

동아국악콩쿠르가 창설되던 때도 생생히 기억한다. 1984년 9월 20일 국악계의 어르신들이 동아일보를 찾아가 “국악계도 클래식이나 무용처럼 콩쿠르를 만들어 후진을 길러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드렸다. 1985년 창설된 동아국악콩쿠르는 왕기석, 왕기철, 유태평양, 정수년, 강은일, 원일 등 800여 명의 젊은 국악인을 배출하면서 국내 최고 권위의 대회로 자리 잡았다. 나는 2013년에 제자들과 함께 콩쿠르에 5000만 원을 기탁했다. 국악예고 건립을 위해 사재를 털어 기부했던 스승 박귀희 선생의 뜻을 따라 후진 양성에 보탬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1988년부터 ‘신(新)창극’ 시리즈도 시작했다. 창극의 주인공은 전봉준 안중근 윤봉길 홍범도 임꺽정 김구 등 우리 민족의 시련을 극복해낸 영웅들이었다. 창극 ‘아리랑’은 러시아 순회공연까지 다녀왔다. 나는 백범 김구의 어머니, 윤봉길 어머니, 홍범도 어머니, 임꺽정의 부인 역할 등 거의 모든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나는 1979년 국립극장 창극단에 들어간 후 30여 년 동안 재직했다. 남산에서 하루 종일 연습을 하다 보면, 큰 유리창 밖으로 낙엽이 떨어졌다. ‘아, 가을이네∼’ 하고 눈물짓다가 또 연습하고, 연습하다 내다보면 눈이 펄펄 내리곤 했다.

“숙선아, 참 이상하다. 어떤 풀은 키우려 해도 밟히면 죽어버리는데 들풀은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난다. 그것이 우리 음악하고 비슷하다.”

스승인 김소희 선생님은 언젠가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다. 그때는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 소리를 사람들 속에 뿌리내리게 하고 싶었던 절박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지난 수십 년간 동아일보는 명인명창 무대, 완창 판소리, 창극, 동아국악콩쿠르 등 국악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위한 수많은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모두들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 국악인들은 동아일보에 커다란 신세를 진 셈이다. 지령 3만 호를 맞은 동아일보에 진심 어린 감사와 축하의 말을 전한다.

안숙선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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