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정치부 차장
이명박 전 대통령(MB)이 청와대 시절 참모들과 모였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을 거론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말 안 해도 MB 생각은 다 안다. 밥맛만 떨어뜨렸을 것이다. 한 참석자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MB가 이날 쓴 안경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쓰던 뿔테 안경이 아니라 날렵한 티타늄 소재 안경이었다고 한다. MB는 잡어회를 된장에 푹 찍어 먹은 뒤 평소 멀리하던 소주잔을 들었다.
“사람이 갑자기 어디로 가기 전엔 몸을 가볍게 해야 하는 법이야. 그래서 바꿨어.”
그런 MB는 12일 바레인으로 강연을 떠나기 전 결국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정치보복이라고 비난했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김관진 전 국방장관 구속이 그동안 은인자중하던 MB를 움직이게 했다. 김 전 장관이 군 사이버사 댓글 의혹으로 구속됐으니 검찰의 다음 목표는 직속상관인 자신일 것이라는 위기의식이다. 동시에 김 전 장관의 구속 자체에 쇼크를 받았다는 말도 있다. MB가 바레인으로 떠나면서 “중차대한 시기에 외교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 게 아주 빈말은 아닐 것이다.
요즘 우리가 적폐청산이란 ‘정치적 내전’에 정신이 팔려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외국에서 전직 국가정보원장 3명, 전직 국방장관(겸 국가안보실장) 1명이 동시 구속되어 있는 이 전대미문의 상황을 심상치 않게 보고 있다는 거다. 특히 대북 정보를 총괄했던 사람들이 줄구속되는 게 북핵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주시하고 있다. 국정원장은 미국으로 치면 중앙정보국(CIA) 국장이다. 외신들은 이번 사건을 보도하며 국정원장을 우리의 공식 영어 표현인 NIS(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Director로 잘 쓰지 않는다. 오히려 Spy Chief(정보 수장)라고 쓴다. 이번 사안을 어떤 프레임에서 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각에선 “국정원이 시스템으로 돌아가는데 전직 국정원장들 구속한 게 안보와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하지만 정보는 사람 장사다. 신뢰를 주고 상대방의 마음을 사는 일이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주미대사관 소속의 한 국정원 직원이 동생뻘 되는 미 정보기관 관계자를 사귀려고 한식당에서 못 마시던 소주 접대를 하던 모습을 짠하게 지켜봤던 기억이 있다. 그 미국인은 한참 뒤에야 국정원 직원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요새 한국 정보기관을 어떻게 볼지는 물어볼 것도 없다.
아무리 안보가 중요해도 잘못된 게 있으면 고쳐야 한다.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불법적으로 청와대에 전달하는 게 우리의 안보 능력을 높인다고 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전직 국정원장, 국방장관을 무슨 잡범 취급하는 게 안보에 꼭 도움이 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칼럼을 마무리할 무렵, 회사 앞에서 알고 지냈던 워싱턴 싱크탱크 관계자를 우연히 만났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을 이끌고 외교부, 국방부를 방문한 뒤 청계천에 놀러 왔다. 이런저런 말을 하다 결국 적폐청산 이야기로 흘렀다. 문재인 정부에 우호적인 그는 기자에게 “이번엔 문재인 정부가 너무 나간 것 아니냐. 한국이 별일 없길 바란다(Gone too far. Good luck)”고 했다. 이름만 대면 청와대나 외교부가 대번에 알 만한 그가 하도 돌직구를 날리기에 기자가 “실명으로 인용해도 되냐?”고 했더니 “오케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냥 익명으로 남겨두련다. 미국인 친구가 ‘적폐 외국인’으로 찍힐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