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은 그 햇빛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좋은 예이다. 이 시는 상처의 무질서가 어떻게 언어의 질서로 바뀌는지를 보여준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첫 행만 보고도, 우리는 화자가 자신의 내면에 오랫동안 들어앉아 있던 상처를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화자는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손톱이 까만 에미’와 더불어 아버지를, 누군가를 섬기는 ‘종’이기에 밤이 되어도 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암시하고 환기하는 마음의 풍경을 상상해 보라. 그것이 상처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래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라는 고백은 아픈 상처의 고백이다. 자신이 쓰는 시에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으며, 자신이 ‘혓바닥 늘어뜨린/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아왔다는 자조의 소리는 상처의 소리다.
서정주 시인에게는 자화상이 스물세 살의 것, 딱 하나만 있고 이후의 삶에 대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좌절감을 안겨준 노년의 모습까지 포함된 자화상들을,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놀라운 말이 환기하는 분연한 용기를 갖고 더 많이 그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가 사용하지 않은 언어의 햇빛이 못내 아쉽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