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I 2012∼2017년 예비타당성 조사 100건 전수 분석해보니
일각에서는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당이 각종 민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미리 걸림돌을 치운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가뜩이나 복지 지출 증가로 세금 씀씀이가 커지는 가운데 나라살림의 부실 여부를 거를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마저 허술해지면 정치권의 선심성 예산 낭비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와 정치권의 짬짜미로 한정된 예산 재원이 별다른 심사 없이 쓰일 경우 결국 피해는 납세자인 국민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 경제성 없는 민원사업 남발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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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최근 “사업비 500억∼1000억 원인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한해 일괄적으로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해 주겠다”고 밝혔다. 정부 발표대로라면 KDI가 실시하는 조사의 30%는 경제성 검증을 받을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다. 경제성이 없어 첫 삽은커녕 사업계획 수립 작업도 할 수 없는 사업이 예산을 받아낼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컨대 △호남고속도로 지선(유성∼회덕) 확장공사(사업비·788억 원) △대구(다사)∼경북 고령(다산) 광역도로사업(780억 원) 등은 올해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경제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정부의 수정안에 따라 이들 사업도 다시 추진될 수 있게 된다. 2012년 이후 이 같은 낙제 판정을 받은 500억∼1000억 원 사이의 국책사업은 모두 10건(7140억 원)이나 된다.
문제는 예비타당성 조사에 탈락한 사업 상당수가 정치권의 요구로 추진되는 ‘민원성 사업’이라는 점이다. 최근 6년간 조사가 진행됐던 사업비 500억∼1000억 원 규모 사업 30건 가운데 22건(73.3%)이 도로 신설·확장, 수련원·박물관 건립 등이었다. 특히 △인천 거첨도∼김포 약암리 4차로 도로 신설 △김포 한강시네폴리스 진입도로 건설 등은 이용자가 적어 경제성이 떨어지는 등의 이유로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탈락했지만 해당 지역 정치인들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사업들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500억∼1000억 원인 중간 규모 사업은 정치인들의 예산 배정 압박이 심한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 기준 현실화 vs 정치권에 굴복
정부는 이번 조치가 예비타당성 조사의 현실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기재부는 “예비타당성 조사가 1999년 도입됐지만 20년째 기준이 바뀌지 않았다”며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사업에 조사를 면제할 경우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에 조사를 집중해 효율적 예산 씀씀이 계획이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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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기준 완화를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국회에는 자유한국당 등의 발의로 예비타당성 조사 기준을 완화하는 내용의 국가재정법 개정안 3건이 이미 국회에 계류돼 있는 상태다. 자유한국당 관계자는 “당초 더불어민주당이 반대하면서 해당 개정안이 통과되지 못했는데 정권이 바뀌며 찬성 입장으로 바뀐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기재부가 이번 조치에 적극 나섰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연구소 고위 관계자는 “예비타당성 조사 없이 SOC 사업을 추진할 경우 정치권 민원에 예산을 배정할 기재부의 권한도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박재명 jmpark@donga.com·이건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