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재협상 기정사실화하며 강공
“우리는 나쁜 무역 거래들 때문에 피폐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 시간) 프랑스로 가는 전용기 ‘에어포스 원’에서 세계 무역전쟁을 촉발시키는 버튼을 눌렀다. 기자들과의 기내 대화에서 대북 제재에 미온적인 중국에 대해 ‘무역 압박’을 경고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renegotiating)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이날 오후 4시경 한국에 FTA 개정 협상을 위한 공동위원회 요구 서한을 보낸 뒤인 오후 9시경 트럼프의 발언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USTR는 재협상 대신 ‘개정(amendment)’과 ‘수정(modification)’이란 표현만 썼고 한국 정부도 “재협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보다 앞서 “어제 재협상이 시작됐다”며 재협상 개시를 기정사실화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FTA에 대한 오해가 잇단 강성 발언과 오판을 불러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한국을 보호하고 있지만 매년 400억 달러를 무역에서 잃고 있다”며 “대한(對韓) 무역적자가 연간 400억 달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USTR가 밝힌 지난해 미국의 대한 상품수지 적자는 276억 달러다. 트럼프 대통령은 각국에 통관 신고된 수출입 기준의 무역수지가 아니라 거주자와 비거주자 간 수출입 거래를 모두 계상하는 경상수지를 기준으로 상품수지 적자(2016년 기준 434억 달러)를 말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힐러리 클린턴이 한미 FTA가 5년 계약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연장 기간(extension period)이다”라고 했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 직후에도 “한미 FTA가 2주 전에 종료됐다”고도 발언했다. 하지만 한미 FTA는 만료 시한이 없다는 게 통상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새로운 대북 제재 결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미국의 대중국 압박도 한층 거칠어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제재에 미온적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향해 “(중국) 국경 너머로 5000만 명이 몰려오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정권 붕괴에 따른 탈북 사태를 예상한 것인데, 남한 인구(5000만 명)와 북한 인구(약 2500만 명)를 혼동한 것 같다.
미국의 제조업 부활을 강조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철강 수입과 관련해서도 대대적인 규제 강화를 예고했고, 규제 윤곽도 제시했다. 이미 미 상무부는 수입 철강이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지를 조사하고, 의회 보고 등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외 여러 나라들이 철강을 덤핑하고 있다. 미국은 ‘쓰레기장(dumping ground)’이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뉴욕=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 / 세종=박희창 / 이세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