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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의 길]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입력 | 2017-07-05 03:00:00

<1> 프롤로그 - 병원




《 1943년 7월 14일, 일본 유학 중이던 윤동주는 교토에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 차가운 감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28년의 짧은 생. 하지만 청년 시인 윤동주의 울림은 우리에게 지금도 여전하다. 윤동주 탄생 100년(12월 30일)을 맞아 그 흔적의 공간을 따라 그의 삶과 문학을 돌아보는 기획을 격주로 연재한다. 집필은 윤동주 연구의 권위자인 김응교 숙명여대 기초교양대 교수가 맡는다. 》
 
그에게 언어는 생명이었다.

글을 쓰려면 “피로 쓰라”라고 했던 니체, “온몸으로” 시를 쓴다던 김수영, 심비(心碑)에 새겨진 글을 열망했던 바울처럼 한 해 동안을 두뇌가 아니라 몸으로 헤아려 가까스로 글 몇 줄을 얻었던 윤동주에게 글쓰기는 목숨이었다.

“딴은 얼마의 단어를 모아 이 졸문을 지적거리는 데도 내 머리는 그렇게 명석한 것은 못 됩니다. 한 해 동안을 내 두뇌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써 일일이 헤아려 겨우 몇 줄의 글이 이루어집니다.”(윤동주, ‘화원에 꽃이 핀다’·1939년)

그는 모국어를 빼앗겼다. 모국어를 빼앗긴 것은 숨을 빼앗긴 것이다.

연희전문에 입학하던 해, 1938년 3월에 조선어 사용금지와 교육금지령이 내려졌건만 금지된 조선어 수업을 열었던 외솔 최현배 교수는 그해 9월, 3개월간 투옥되고 강제 퇴직을 당한다. 윤동주가 동생들에게 자랑하던 존경하던 선생님이었다. 그가 침묵하기 전 1939년 7월 8일에는 국민징용령이 내려졌다. 언제든 전선으로 끌려가야 하는 신세였다. 그 충격이었을까. 그해 9월 ‘자화상’을 쓴 이후 1년 2, 3개월 동안 그는 글을 쓸 수 없었다. 1939년 11월 10일부터는 창씨개명령으로 성씨마저 바꿔야 할 지경이었다.

모두 조선어와 연관된 일이었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고 숨쉬기도 괴로웠던 시대였다. 침묵기를 거쳐 1940년 12월 그는 ‘병원’을 쓴다. 조선어를 쓸 수 없는 조선은 이미 병원이었다. 몇몇 문인이 일본어 친일 시를 발표하던 시기에, 오랜 침묵을 마친 동주는 일본어가 아닌 금지된 조선어로 썼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윤동주, ‘병원’(1940년 12월)

윤동주의 시 ‘병원’ 육필원고.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1연은 병실에 있지만 “나비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병든 여인 이야기다. 병든 여인은 식민지가 된 한반도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2연은 “나도 모를 아픔”으로 “지나친 시련, 지나친 피로”에 시달리면서도 성내지 않으려 인내하는 윤동주의 모습이 엿보인다. 늙은 의사는 화자의 병명을 모른다. 3연에서 서로 병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고 동주는 귀띔한다.

왜 아픈 이가 누웠던 자리에 눕겠다고 했을까. 병자가 떠난 자리에 누워보겠다는 것은 병자가 겪는 아픔을 공유하겠다는 뜻일까. 병원이라는 특정 공간을 넘어 그는 이 세상의 죽어가는 존재들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의 글에는 디아스포라 난민, 부모 잃은 결손가족, 거지들, 슬픈 족속, 여성 노동자, 복선철도 노동자 이야기가 가득하다.

“나는 아픈 인간이다”라고 도스토옙스키가 ‘지하로부터의 수기’ 첫 줄에 썼듯이, 윤동주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라고 후배 정병욱에게 말했다. 윤동주 자신이 질식할 정도로 영혼의 질병에 걸린 상황이었다.

사실 한 인간의 삶은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은 “내 삶이 유언이다”라는 짧은 말을 남겼다. 윤동주의 삶을 한 줄로 줄인다면 바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일 것이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이 한 구절에 자극받아 나는 ‘곁으로’라는 책을 썼다.

‘병원’은 윤동주 문학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는 작품이다. 이 시를 대표 시로 여겼던 그는 시집 제목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으로 하려 했다. 그가 왜 병원 이미지를 앞세웠는가를 곰삭여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는 구절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라는 다짐과 겹친다. 무언가 실천하려 했던 윤동주. 그의 시를 읽는다며, 행동하지 않고 윤동주를 안다고 한다면 혹시 그를 상품으로만 소비하는 행위는 아닐까.

그는 면벽한 채 방 안에서 명상만 하던 도인이 아니다. 아픔 곁으로 다가가려 했던 구도자였다. 3월 101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윤동주를 민족시인이나 저항시인이나 기독교시인이 아니라, ‘자기성찰을 하고 실천을 고민했던 시인’으로 529명(51.7%)이 선택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윤동주 시비는 한국 중국 일본에 서 있다. 그의 시는, 중국에는 조선족 교과서이지만, 세 나라의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의 흔적은 동북아시아 세 나라에 남아 있다. 중국 용정중학교 운동장에서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가 좋아하는 축구를 했던 적이 있다. 그가 다녔던 도시샤(同志社)대 벤치에 앉아, 후쿠오카(福岡) 구치소 뒤편에서 오오래 그를 호명했었다.

김응교 숙명여대 기초교양대 교수

누구나 환자다. 세상은 환자로 가득 찬 병실이다. 이제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이제 그가 사랑의 총량을 키우던 곁으로 마음의 채비를 차리고 가보자.
 
김응교 숙명여대 기초교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