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며 이따금 연필로 밑줄을 긋고 이런저런 메모를 더한다. 물론 당연히 혼자 보는 책에만.
그런데 몇 차례 거듭 읽은 책을 오랜만에 다시 펴들 때, 이렇게 밑줄 긋고 메모하는 게 말짱 헛짓 아닐까 싶을 때가 적잖다.
그때 느껴지는 건 허무함이 아닌 부끄러움이다. 공감 깊다 여겨 밑줄 그은 책 속 문장들만 잊지 않도록 거듭 새기며 살아왔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적어도 열 배쯤은 나은 사람, 적어도 백 배쯤은 후회가 적은 사람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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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수없이 들은 말을 반복한다”고 아버지께 불평했다. 답 없는 세상에서 그 말씀만 따르고 살았어도 조금은 지금보다 사람다운 사람이지 않았을까, 뒤늦게 생각한다.
지저분한 기름때처럼 굳어 있던 집 안 책장을 조금씩 허물며 정리하다가 여러 번 손을 멈췄다. 어수룩한 내 의지와 계획대로 채워온 부분이 삶에서 어느 정도나 될까. 우연히 훑다 펴든 페이지에서 퍽 하고 뒤통수 때리는 문장이 드문드문 나왔다.
ⓒ오연경
뒤늦게 깨달아 소용없음이 틀림없는 사고(思考) 묶음의 효용은 뭘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부인하기 어려운 명제가 어깨를 짓누르지만, “그래도 나보다 반 발짝만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어 보라”는, 어제 죽은 내가 오늘의 나에게 남긴 유언. 그 언저리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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