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시대의 남북한’ 책 펴낸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학계에서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두 인물로 읽힌다. 보수 성향의 일부 학자들은 그를 친(親)김일성 정치인이라고까지 평가하는 반면 진보 진영에선 1994년 북한 핵 위기 때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인물이라고 본다.
이완범 교수는 ”1977년부터 카터가 추진한 3자회담은 이후 4자, 6자회담으로 발전했다”며 ”카터의 제안은 동북아에서 다자간 외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밑거름이 됐다는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6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교수는 “카터는 도덕주의자로 불리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인”이라며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면서도 북한의 인권 탄압과 5·18민주화운동 당시 한국 상황엔 눈감았던 걸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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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시기 한미 동맹이 위기에 빠졌던 건 박정희 정권이 핵무장을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과 직접 접촉해 한반도 평화 체제를 구축하고, 한국의 핵 무장을 불필요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카터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1974년부터 한국의 핵 개발 움직임을 감지했다. 1977년 대통령이 된 카터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추진한다. “북한은 북-미 양자회담을 원했지만 카터는 남북한을 대화 테이블에 앉히는 3자회담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카터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동북아 외교의 핵심 의제로 삼은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했다. △전쟁 억제 △한국의 핵 무장 견제 △개인의 정치적 업적 달성이다. “카터는 냉전 종식을 자신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중동 최초의 평화협정이라 불리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1979년)도 그 일환인 거죠.” 하지만 카터가 추진했던 3자회담은 김일성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는다.
1994년 북한 핵 위기 당시 만난 지미 카터(오른쪽) 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일성. 사진 출처 The Carter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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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