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의 묘기 농구단 글로브트로터스 선수가 북한 여런이에게 농구공을 가지고 묘기를 보여주고 있다.
두 명의 미국인이 평양의 한 식당 앞에서 티격태격 농담을 주고받고 있다. 한 명은 뉴욕의 묘기 농구단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소속 선수, 다른 한 명은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다. 둘은 식당 입구에 놓인 뱀술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큰 술병에는 왕뱀 두 마리가 들어 있다. 다큐 감독이 “힘나게 하는 데 최고이니 한 잔 마시라”고 권하자 농구선수는 “무섭다” “징그럽다”를 연발하며 뒷걸음질을 친다. 둘 다 뱀술을 보고 신기해하는 표정이다.
4년 전 미 프로농구(NBA) 스타 데니스 로드먼과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농구팀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을 만나고 농구교실을 열었다. 로드먼 일행과 동행한 다큐멘터리 제작팀은 이들의 방북 활동과 북한의 생활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바이스(Vice·악)’라는 제목의 이 다큐는 로드먼 일행이 북한을 방문한 4개월 후 HBO 케이블 채널을 통해 미국에서 방송됐다.
▲ 동영상-바이스의 북한 다큐멘터리 ‘은둔의 나라’
당시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던 필자는 밤 11시에 이 다큐를 챙겨봤다. 보기 전에는 다큐에 북한에 호의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생각했다.
당시 다큐 제작팀은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북한 당국의 정식 초청을 받아 방문했고 김정은까지 만나는 행운을 누렸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북한을 방문한 미국 프로농구 스타 데니스 로드먼과 함께 묘기 농구단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와 북한팀의 친선경기를 보며 박수를 치고 있다. 오른쪽은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
북한 측 인솔자는 제작팀이 도착하자마자 “우리 지시를 어기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경고를 하는가 하면 언제 카메라를 켜고 꺼야 할지 일일이 지시했다고 라이언 더피 감독은 밝혔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로드먼 일행이 북한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였다. 학생들은 모두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지만 마우스만 이러 저리 움직일 뿐 실제로 컴퓨터를 사용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자유롭게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경직된 표정으로 컴퓨터를 응시하고 있는 북한의 어린 학생들을 보니 왠지 오싹하기까지 했다고 더피 감독은 회고했다.
또 제작팀이 찾아간 수족관과 서양식 슈퍼마켓에서는 북한 주민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들이 본 북한의 모습은 외국인에게 보이기 위한 ‘설정된(staged)’ 모습이었다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로드먼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나오는 시간은 합쳐 봐야 5분도 되지 않는다. 로드먼은 다큐용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제작팀에 따르면 로드먼은 방북 이후 자신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자신이 나오는 분량을 줄여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농구 관람 후 김정은이 로드먼 일행을 위해 마련한 만찬에 카메라의 접근은 허용되지 않았다. 제작팀이 밝힌 뒷얘기에 따르면 로드먼이 프랭크 시내트라의 명곡 ‘마이웨이(My Way)’를 부르자 김정은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이어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등장한 북한 여성 록밴드는 미국 영화 ‘로키’의 주제가를 연주하며 흥을 돋웠다.
‘마이웨이를 들으며 김정은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밤에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후 기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 후회는 없다’는 가사의 ‘마이웨이’를 들으며 혹시 그는 핵무기 개발로 가는 길이 옳다는 자아도취에 빠지지는 않았을지….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