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의대 교수
인간의 무의식을 읽어내는 전문가로서 정신분석가는 사람 사이의 대화를 넓게, 깊게 살펴보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이번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의 생중계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국민으로서 위기에 처한 나라 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한 것은 물론이고 질문, 답변, 말과 행동의 흐름이 표출되는 양상을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진실은 아직 희미하고 장면들만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청문회 자리에 나온 사람들의 겉과 속, 양면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니 국조위원(이하 위원)과 증인, 양쪽 모두가 자기를 지켜서 살아남으려는 생존 본능과 그러기 위해 필요한 공격 본능을 드러냈습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생존 본능과 공격 본능은 마음을 움직이는 두 축입니다. 이번 국정조사 청문회에 ‘정신분석 채널’이 참여했다면 공격과 생존을 다룬 실시간 드라마의 해설은 다음과 같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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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출석한 증인들이 다소 풀 죽은 모습으로 앉아 있다. 전투의 대치 국면과 같이 위원들이 그들과 마주하고 있다. 같은 공간에 방송국 카메라맨, 사진기자, 취재기자가 들어차 있다. 긴장감이 흐르고 드디어 시작. 위원장이 국정조사의 엄중함을 설명한다. 위원들의 의사진행 발언이 바쁘게 이어지는데 질의응답 시간이 부족할까 봐 보는 사람의 마음이 다급해진다. 가끔은 의사진행 발언이 마치 위원 개인을 위한 홍보 시간인 것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광고 시간이 끝나야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불출석 증인들에 대한 동행명령장을 국회 경위들에게 전달하는 ‘행사’는 왜 꼭 보여주어야 하는지, 당연하고 단순한 행정 처리로는 부족한지 궁금하다.
시간이 흘러 증인 대표의 선서가 있고 질문과 답변이 연속 이어진다. 불출석 증인들의 빈자리가 썰렁하다. 출석한 증인들은 불출석 증인들 때문에 재수 없게도 자신에게 질문이 쓸데없이 더 오랜 시간, 여러 번 쏟아질 것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증인에게서 모른다는 답변들이 쏟아진다. 그럴수록 위원들의 목소리는 높아진다. 시간을 넘기고 마이크가 꺼진다. 정말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것과 거짓말의 경계는 안개처럼 희미하다. 보는 사람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증인은 억울해하고, 위원들은 분노한다. 질문의 창이 날카로워질수록 방패도 단단해진다.
위원들은 생각한다. 단단한 방패를 뚫어야만 진실을 알아낼 수 있다. 그러려면 여러 방법으로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놓친 것은 서양의 ‘죄책감 문화’와 달리 대한민국은 ‘수치감 문화’라는 차이다. 우리는 누군가 잘못을 했을 때 책임을 묻기보다는 수치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불에 오줌을 싼 어린아이에게 이불을 빨아서 책임지게 하기보다는 창피를 무릅쓰고 키를 쓴 채 동네를 돌며 소금을 얻어 오게 했다. 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철저하게 물어야 하는 자리에서 망신을 주고 수치심만 유발시킨 결과는 미약하다. 방패를 더 단단하게 만들 뿐이다. 이제 ‘키를 쓰고 소금 얻어 오기’는 전통을 떠나 아동 학대에 속한다. 같은 맥락에서 증인에 대한 수치심 유발이 지나치면 죄의 유무를 떠나 감정 학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질문의 겉이 논리적 추론이더라도 속이 감정싸움이어서는 진실을 찾아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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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번 국정조사의 한계는 무엇이었을까요. 동행명령과 처벌 거론으로는 증인 출석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이해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번 국정조사가 스스로 초래한 한계는 죄를 묻는데 죄책감이 아닌 수치감에 초점을 맞춘 점에 있다고 봅니다. 그 점이 진실하지 않은 답변과 다수 증인의 불출석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요.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의 핵심은 질문과 답변, 공격과 방어입니다. 답변 기회만 겨우 있는 증인들보다 질문권을 독점한 위원들이 훨씬 유리합니다. 누가 보아도 양편의 관계는 위와 아래가 확실한 수직적 관계입니다. 수직적 관계는 위원이 증인에게 하는 질문이나 요구에서 더욱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본인의 의도와 달리, 위원이 증인들에게 “손들어 보세요!” 하는 순간 함정에 덜컥 빠집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의 잘못을 꾸짖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보는 이의 마음에도, 증인의 마음에도 ‘이렇게까지?’ 하는 파도가 밀려옵니다.
“당신은 천당에 못 간다!”는 말은 스스로 파는 더 깊은 함정입니다. 증인이 되풀이하는 “저는 정말 모릅니다”에 질문을 던진 위원이 감정적으로 말려들어 생긴, 듣고 보기에 난감한 상황입니다. 그 순간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이 떠오르면서 정치권과 종교계의 경계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삶은 정해진 팔자보다는 애써 준비하고 노력하기 나름에 달렸다고 현대 심리학은 말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