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으로 떨어진 건 한 순간이었다.
서울 강남 8학군에서 초중고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뉴욕대 의료경영석사 학위를 딴 정재엽 씨(42)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제약회사에 합류해 일하던 중 2013년 부도를 맞았다.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아버지는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수감됐다.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던 삶의 밑바닥에서 그가 절박하게 부여잡은 건 문학이었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이런 경험을 담은 '파산수업'(비아북)을 출간한 그를 최근 서울 서초구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정 씨는 기적적으로 회사를 회생시켜 매각한 후 올해부터 직원 3명을 두고 의약품과 의료기기 수입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사무실의 한 벽면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 주머니에 꽂힌 책을 본 채권자들이 '뻔뻔한 거니? 아니면 강한 거니?'라며 어이없어 했어요. 하지만 저는 책이 주는 에너지 때문에 말 그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어요."
'금수저'에서 하루아침에 파산자가 되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벌레로 변해 경제력을 잃은 주인공 그레고르가 바로 자신이었기에.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며 늘 어렵기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됐다. 암 투병 중에도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이해인 수녀의 시집 '희망은 깨어 있네',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을 보며 세상을 버리려 했던 마음도 되돌렸다.
"제가 사라져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책은 상황에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거리를 두게 만들어 줬어요.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지음)을 보며 제 처지가 세 살 때 버림받은 모모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얻기도 했고요."
'파산수업'에서 이해인 수녀의 시집을 인용하고 싶어 일면식도 없는 이 수녀에게 원고를 보냈다. 이 수녀는 흔쾌히 수락한 것은 물론 휴대전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해 테레사 수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파산수업' 부제의 아이디어도 제안하고 추천사까지 보내왔다.
부도 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봤던 그는 올해 2월 '안데르센 자서전' 중고책을 샀다.
"새 책은 못 사지만 중고책이라도 3년만에 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울컥하더라고요. 역경을 많이 겪었던 안데르센의 일생에 공감을 느껴 꼭 갖고 싶었거든요."
그는 이제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붙잡고 일어설 수 있는 무언가를 꼭 찾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게는 그게 책이었어요. 공황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에 바람막이가 돼 주고 에너지를 준 책이 없었다면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