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례 좇아 중진국 도달했지만 벽에 갇혀 짓눌려 있는 현실 과거 진위만 따지는 훈고의 시대, 총선 후 ‘난장판’ 국회도 불변 미래 내다보며 질문하도록 지성을 재무장해야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
문제는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것이 역동성을 보장하는 생기 넘치는 혼란이 아니라, 벽에 갇힌 채 방향을 못 잡거나 들기 버거운 천장 하나를 머리에 이고 짓눌려 가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서로가 다 숨이 막혀 가고 있는데도 상대방의 숨통만 짓누르느라 자신의 숨이 끊어져 가는 줄도 모르는 매우 무지(無知)한 지경에 빠져버렸다. 시대가 흐르지 못하여 나라 전체가 썩고 있는 것이다. 썩지 않은 곳이 한 군데도 없다. ‘흐르는 물이라야 썩지 않는다(流水不腐·여씨춘추 진수).’
썩는 시대를 살리려면 흐르게 하는 수밖에 없다. 시대가 흐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새 시대에 맞는 새 비전을 설정하고, 다수의 세력이 그 비전을 중심으로 모여 끌고 간다는 것이다. 시대에 맞는 비전은 그 시대의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구세대가 새 비전을 만들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그렇다.
얼마간은 유효했더라도 지루하고 비효율적인 훈고의 역사에서 벗어나려면 지성을 질문하는 힘으로 재무장시켜야 한다. 그래서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질문은 자신만의 고유한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원형을 뒤틀려는 시도이다. 미래는 원형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여 창백한 진위 논쟁으로부터 이탈하면서 비로소 열린다. 미래를 보려는 사람은 지켜야 할 이념에 빠져있지 않고,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부단히 질문한다. 이 질문은 마침내 우리 시대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건설하는 일에 닿을 것이다. 질문은 우리를 꿈꾸게 하고 정해진 모든 것을 비틀어 미래를 향하게 한다. 도전적인 질문은 우리에게 선도적이고 전략적인 역량을 갖게 할 것이다.
대답에 익숙한 사람은 대답이 기능하는 정도의 ‘사람’으로 고착된다. 질문을 시도하는 사람은 질문이 제공하는 수준으로 상승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결국 ‘사람’이 관건이다. 20대 총선이 끝난 직후 동아광장에 올린 ‘총선 이후, 정치의 새로운 비전 찾아야’라는 글에서, 총선 결과 여소야대로 급변하고, 또 제3당이 출현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매우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비효율적인 저질 정치에 아무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정치 구도가 달라졌어도, 그 구도를 채우고 있는 ‘사람’이 그대로인 한 변화는 불가능하다. 요즘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은 19대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더욱 답답한 것은 지금 리더가 되겠다고 나서는 분들이 나이와 경력에 상관없이 모두 시대의식을 찾으려는 질문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내뱉는 대답에만 익숙한 정치 기능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람’이라는 각도에서 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구태의연하다. 아직 우리는 과거에 잡혀 있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