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호 군사전문기자
영국 왕실의 재산은 적게는 수천억 원, 많게는 수조 원으로 추정된다. 영국 왕실의 경제적 가치도 약 570억 파운드(약 81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해리 왕손은 10대 시절 음주와 누드파티 사건을 일으켜 ‘왕가의 말썽꾼’으로 불렸다. 하지만 지금 그를 질시하거나 밉게 보는 영국민은 드물다. 오히려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다. 왜일까.
최고 특권층인 그가 사지(死地)에서의 근무를 자원하는 솔선수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2006년 소위 임관 이후 작년에 제대할 때까지 공격헬기 조종사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장을 누볐다. 2012년 탈레반 무장 세력이 그가 배치된 기지를 급습해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끝까지 복무했다. 왕실의 만류에도 “군이 원하면 어디라도 달려간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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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위협 등 초유의 안보위기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책임)’는 어떤가. 헌법에 국방의 의무가 명시된 이 나라는 유독 지도층과 특권층 가운데 병역 면제자가 많다.
주요 각료와 고위 정치인, 재벌가의 자녀들은 이런저런 ‘합법적 사유’로 군대를 가지 않은 경우가 흔하다는 얘기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4급 이상 고위 공직자 26명의 아들 30명이 국적 이탈 또는 상실로 병역을 기피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대부분 외국에서 대학을 나와 취업을 하면서 한국 국적을 포기한 경우다. 이중국적을 악용한 금수저들의 ‘병역 일탈’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한 고위 공직자는 “아버지로서 아들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국적 포기로 병역을 기피한 아들을 두둔하면서 혈세로 봉급을 챙기는 그의 이중성은 국민적 공분을 샀다.
사회 지도층과 특권층이 장기 유학이나 원정 출산으로 자식을 군에서 열외시키는 행태는 국민 통합을 갉아먹는 주범이다. 대다수 ‘흙수저 서민’들이 느낄 상대적 박탈감은 둘째치더라도 수저 색깔에 따라 ‘병역 차별’이 횡행하는 모습은 ‘정의로운 대한민국’과 한참 거리가 멀다. 일각에서는 국방의 의무를 기피하기 위해 국적을 포기하면 취업과 공직 진출을 제한하거나 아예 범죄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병무청은 관련법을 개정해 올해 6월부터 1급 이상 공직자와 그 자녀(9300여 명)의 병적사항을 별도로 관리하면서 병역 이행 실태를 점검하고 있다. 병역의무 이행에 긍지를 갖는 사회 분위기 조성이 그 취지라고 밝혔지만 실상은 지도층 자녀의 병역 기피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씁쓸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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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들이 병역 이행에 앞장서는 것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첫 단추를 끼우는 작업이다. 그래야 이 나라도 금수저가 존경받는 사회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현 정부가 출범 이후 줄곧 강조한 국민대통합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