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작은 도서관’ 헌책방, 대부분 밀려나 헌책 구하는 기쁨과 시간 냄새를 쫓을 기회도 없어 요즘 일부 고서적 ‘반짝’ 인기지만… 헌책방 구경 못하는 건 안타까워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 문학평론가
그런데도 책에 관한 이야기라면 당연히 헌책방과 헌책이어야 제격이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 책의 첫 장을 넘길 때 가슴에 느껴지는 서늘함은 늘 기분 좋다. 하지만 이보다 더 소중한 기쁨은 헌책방에서 구한 낡은 책 한 권에서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꼭 가지고 싶었던 귀한 책을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값싸게 구했을 때 그 기쁨은 어디에도 견줄 수가 없다. 헌책은 누군가가 사용한 뒤에 내버린 것이지만 흘러간 시간의 내음이 거기서 묻어난다. 나는 이 독특한 헌책의 냄새가 그리 싫지 않다. 그 내음 속에는 책을 처음 샀던 사람의 이야기까지 함께 담겨 있기 마련이다.
책의 속표지에는 대개 책을 산 사람이 써넣은 이름이 적혀 있다. 어떤 책에는 날짜와 책방 이름까지 적어 놓은 경우도 있다. 그리고 ‘새로운 각오로!’라든지, ‘나의 청춘을 위해!’라고 적어 넣은 짧은 문구가 그 책을 샀을 때의 결심도 드러내어 준다. ‘사랑하는 ○○에게’라는 서툰 펜글씨는 아련한 연애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책장의 행간에 수없이 그어진 밑줄로 보아 이 책의 소유자가 얼마나 열독(熱讀)을 했었는지를 헤아릴 수도 있다. 이런 자잘한 내용들이 말하자면 책의 향취를 더해주고 ‘책의 문화’까지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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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가에는 옛날 청계천 헌책방에서 샀던 책들이 몇 권 꽂혀 있다. 이광수의 ‘무정’이 그중의 하나다. 비록 초판본은 아니지만 회동서관에서 나온 이 책은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다. 표지까지 온전한 것이 자랑스럽다. 염상섭이 고려공사에서 펴낸 소설 ‘만세전’의 초판본(1924년)도 있다. 우연하게 얻은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 초판본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책이 되었다. 근래 고서 경매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팔린 시집들이 심심치 않게 화제가 되곤 한다.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이나 백석의 시집 ‘사슴’은 그 당시 헌책방에서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책들이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최근에 복각본조차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니 놀랍다.
옛것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런 변화야말로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서울의 대학가 어디에서도 변변한 헌책방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본 도쿄의 간다(神田) 고서점 거리가 여전히 최고의 관광지로 손꼽히고 있다는 사실이 부럽다.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