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무’의 뱍유천.
이승재 기자
그렇다. 이미지가 실재(實在)인 세상이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영화 ‘곡성’에서 신들린 연기를 펼친 소녀 배우도 이런 명대사를 싸늘하게 읊조리지 않았던가. “뭣이 중헌디(중요한데)? 뭣이 중허냐고, 뭣이!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모르면서).”
2. 실제로 배우들을 만나면 어떤 모습이 그 배우의 진짜 모습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가장 충격을 받은 배우는 중국 배우 량차오웨이(양조위)다. 부산영화제에서 그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렇게 내성적인 배우는 처음 보았다. 1시간 인터뷰 동안 그는 나의 눈을 마주친 적이 거의 없다. 테이블 위 찻잔의 끄트머리만 연신 만지작거리며 눈을 둘 데를 몰라 했고, 보기에 따라서는 자신감조차 없어 보일 만큼 소심한 모습이었다. 영화 ‘색, 계’에서 저돌적으로 탕웨이를 뒤집으며 가학적 섹스로 복잡한 영혼을 스스로 잠식해 들어갔던 그 남자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조용하고 내향적인 분인 줄 몰랐다”고 하자, 량차오웨이가 말했다. “이게 진짜 나인지, 카메라 앞의 내가 진짜 나인지 저도 잘 모를 때가 있어요. 카메라 앞에 서지 않는 지금의 나야말로 어쩌면 ‘연기를 하고 있는 나’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실제로 마주한 원빈은 스크린 속 그 남자가 아니었다. 소심해 보일 만큼 조심성이 많고 신중했다. 말끝마다 “아, 이건 말하면 안 되는데…” 하는데, 뭐 그리 중요하거나 내밀한 내용들도 아니었다. 그만큼 원빈은 자신이 알려지는 것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스크린 속 용감하고 멋진 원빈이 팬들에겐 ‘진짜 원빈’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말했다. “제가 사람들에게 심어준 판타지(환상)를 죽을 때까지 지키는 게 배우로서 목표입니다.”
3. 엊그제 배우 박유천이 성폭행 혐의로 여성에게 피소되었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난리가 났었다. 결국 고소했던 여성이 취하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어느덧 언론은 사회복무요원으로서 그가 과연 성실하게 복무했는지를 두고 파고들고 있다.
나는 그가 2014년 ‘해무’란 작품을 스크린 데뷔작으로 선택했을 때 남다른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자기 인기에 편승한 로맨틱 코미디도 얼마든지 있을 법한데, 하필이면 이토록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데다 감정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참극을 통해 정면 도전하겠다는 태도가 대견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박유천은 살육이 난무하는 밀항선 속에서 오직 사랑하는 조선족 처녀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청년의 모습으로 감동시켰다. 영화에서 “나를 어떻게 해보자는 겝니까?” 하는 조선족 처녀에게 그는 진땀을 쏟으면서 풋풋한 대사를 던진다.
“아니여. 절대 아니여. 나는 애초에 그런 짓(섹스) 자체를 하덜(하질) 못해. 아, 그러니께(그러니까), 그…, 할 수는 있는디(있는데). 나가(내가) 남자잉께(남자니까), 건강한. 근디 막 여성을 고로코롬(그렇게) 거시기 해버리는 그런 남자는 절대 아니다, 이 말이제(말이지). 잉. 그러제(그렇지).”
영화 속 그가 ‘진짜’ 박유천인지, ‘가짜’ 박유천인지 나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반듯하고 언제나 진정성 넘치는 ‘배우’ 박유천의 판타지에 금이 간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