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에 가까웠던 漢 유방, “혁명 후 달라져야 한다”는 충언 받아들인 뒤 번영의 기초 쌓아 한국 대통령, ‘성공’ 기억에 남지 못한 것은 고언을 듣지 못한 게 根因 듣지 못하면 정치가에서 국가경영자로 변신도 못해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
그렇다면 고작 이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역사의 진행 방향을 정확히 읽고 또 거기에 맞는 절묘한 현실적 판단을 하여 구세력(봉건제·封建制)과 신세력(군현제·郡縣制)을 통합하는 창의적인 제도(군국제·郡國制)를 만들어 운용하는 크고도 큰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
나는 한 가지를 발견하였다. 유방이 이룬 모든 업적은 바로 이 한 가지 점에서 비롯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유방은 원래 학자들을 싫어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학자들은 대개는 인문학이나 정치학 범위에 포함된다. 유학자들이 쓰는 두건에다 오줌을 쌀 정도로 그는 학자들을 조롱하고 우습게 알았다. 그렇기도 할 만한 것이 유방이 천하를 차지하기 위하여 처절한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거나 못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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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역생육고열전((력,역)生陸賈列傳)’의 기록을 요약하면, 정권을 잡을 때와 잡고 나서는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혁명을 할 때와 혁명을 이루고 나서는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유방은 화가 난 상태였으면서도 육고의 이 말을 알아들었다. 알아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나야만 비로소 알아들은 것으로 봐줄 수 있다. 유방은 육고에게 정기적으로 글을 올리게 하고 그것을 대신들과 돌려봤다. 더 나아가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고 통치의 방향을 새로운 곳으로 이끌었다. 육고가 올린 글들은 나중에 유방이 ‘신어(新語)’라는 제목을 붙여 편찬해 주고, 모든 신하에게 읽혔다. 한나라는 이렇게 하여 초기에 튼튼한 기반 위에서 번영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통치의 마당에 이 정도의 이야기는 쓰여야 하지 않겠는가.
기존에는 아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나 자기만의 확신에 대해서도 다른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그것들을 바꿀 수 있는 내면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다. 물론 모든 이야기로 자신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들을 만한 말을 골라 들을 수 있는 내면을 말하는 것이니, 여기에는 내용의 선별 능력까지도 포함된다. 이 정도는 갖추고 있는 사람이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모름지기 우선은 들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대통령은 성공의 기억으로 남아있지 못하다.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볼 때는 듣지 않아서다. 자신의 확신과 감(感)과 몇 조각의 지식과 경험으로만 덤빈다. 이것들마저도 주위를 맴도는 몇몇 패거리하고만 공유한다. 이미 정해진 것으로 덤비니 아직 정해지지 않은 개방적인 미래는 접촉할 수도 없다. 듣지 않으니 변할 수가 없다. 정권을 잡을 때는 정치가로 존재하다가 권좌에 오른 후에는 국가 경영자로 변신해야 한다. 통치의 실패는 변신의 실패다. 변신의 실패는 듣기의 실패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