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그런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 7분 능선을 넘었다. 5일 치러진 공화당 경선에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에게 한 방 맞았지만 15일 ‘미니 슈퍼 화요일’에서만 승리하면 트럼프 대세론을 꺾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그를 ‘막말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당 지도부는 중재 전당대회를 열어 다른 후보를 지명하는 방안까지도 검토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슈퍼 화요일’인 1일 기자는 버지니아 주의 매클린 고등학교에서 1시간가량 유권자들을 인터뷰했다. 희한한 건 “트럼프를 찍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그날은 트럼프가 버지니아에서 가장 많은 34%를 득표한 날이었다. 인터뷰를 거절했던 한 백인 중년 여성은 차를 몰고 다가와 “왜 한국에서 트럼프에 관심을 갖느냐”며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는 10개가 넘는 질문에 답을 해줬지만 “트럼프를 찍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비밀”이라며 답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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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유세장에는 늘 ‘침묵하는 다수가 트럼프와 함께하고 있다’는 팻말이 붙어있다. 취재 현장에서 경험했던 ‘다수의 침묵’ 역시 ‘트럼프 열기’의 한 단면으로 해석하는 듯했다.
하지만 침묵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말하지 않는 것’과 ‘말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말하지 않는 건 자존심 때문이지만 말하지 못하는 건 부끄러움 때문이다. 미국이 위대하지 않게 된 이유로 피부색이 다른 내 이웃을 지목하는 것 자체가 통합을 추구해 온 미국인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트럼프의 네바다 돌풍’도 해석이 가능하다. 트럼프의 무덤이 될 거라는 네바다에서 그는 히스패닉 표를 44%나 쓸어 담았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겠다”는 사람을 중남미 이민자들이 선택한 이유는 뭘까. ‘몰려오는 동포들에게 내 일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바로 히스패닉의 표심이었다. 결국 트럼프는 몸엔 해롭지만 갈증 해소엔 그만인 탄산음료 같은 존재인 셈이다.
선거에서는 숨어있던 이기심이 발현된다. 트럼프의 인기는 2016년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추한 욕망’의 총체적 발현이다. 그 욕망이 ‘변화를 갈망하는 시대정신’으로 둔갑해 미국을 분열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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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