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4차 핵실험에 이어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준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 S 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김정은이 한물간 미국프로농구(NBA) 스타 데니스 로드먼을 2013년 북한에 초청할 정도로 농구팬인 것을 빗댄 것이다.
농담에 웃고 말았지만 S 씨 표정엔 웃음기가 없었다. 그는 “김정은 원맨쇼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전담 수비수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수비수가 미국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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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런 조치들이 핵실험 후 나온 ‘사후적 억지(deterrence)’라는 데 있다. 전쟁 억지력은 도발을 못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도발이 끝난 후 대책을 내놓고 있다. 미국은 김정은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버스 떠나자 손 흔드는’ 격이다. 도발에 대한 원천 봉쇄와 거리가 멀다. 워싱턴의 많은 한반도 전문가가 미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북한 이슈가 뒤로 밀렸다고 지적한 것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에 정책 우선순위를 바꿔 달라고, 북한이 딴생각을 못 하게 ‘외과 수술적 폭격’ 가능성만이라도 언급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임기를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미 본토에 위협적인 ‘이슬람국가(IS)’를 막는 것도 버거워 보인다. 핵실험 엿새 후 열린 오바마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에서 핵실험의 ‘핵(核)’ 자도 안 나온 것만 봐도 뭐가 우선인지 드러난다.
1일부터 북미 대륙은 본격적인 대선 정국에 돌입한다. ‘세계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라지만 대선은 오롯이 국내 정치 행사다. 오바마 행정부의 초기 대북 정책을 주도했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유세에서도 대북 메시지는 들리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가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거론하다 김정은에 대해 ‘미친×’이라고 욕하는 게 고작이다.
중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제재할 의사가 없다. 미국은 새 대통령이 취임하는 내년 1월까지 국내 문제로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사실상 대북 억지력의 ‘진공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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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권은 김정은의 도발을 남의 나라 일 보듯 한다. 미 의회는 대선 와중에도 대북 제재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총선을 앞두고 유치원생 수준의 ‘진박(眞朴)’ 논쟁에 날이 샌다. 지난해 12월 별세한 스티븐 보즈워스 전 주한 미대사가 생전에 기자에게 한 말이 생생하게 귓전을 때린다.
“한미 양국의 대북 불감증이 심각합니다. 지금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