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주의에 떠밀린 정부와 대화 거부한 노총 경영계, 노사정 합의 파탄에 책임 위원회의 중재 능력도 미흡… 구조개혁 없이는 대화 겉돌아 정규직 근로자 비판할 수 있도록 ‘약자 참여형’ 제도 서둘러야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합의의 파탄은 어느 일방의 책임이 아니라 정부, 노동계 및 경영계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9·15 합의 이후에 보았듯이 정부와 여당은 밀어붙이기식 성과주의에 떠밀려 아직 숙성되지 않은 비정규직법과 양대 지침안을 쏟아내기 바빴고, 한국노총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에 대해서는 대화 자체를 거부하거나 지연하는 등 합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보였다. 정부와 정당, 사회단체, 언론 모두 양보와 타협 분위기를 조성하기보다는 진영과 당파 논리에 빠져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는 등 사회적 합의에 필요한 과정과 조건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가장 아쉬운 대목은 정부와 한국노총 사이에 갈등과 불신의 골이 깊어가고 있을 때 이를 메워줄 조정과 중재능력의 부재였다. 9·15 합의에서 보여준 노사정위원회의 중재자 역할이 이번에는 전혀 작동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일부 언론은 노사정 합의 파기의 원인으로 노사정위원회의 역할 부재를 꼽기도 하였다. 물론 노정 관계의 악화가 극으로 치닫고 있을 때 노사정위원회가 적절한 시기에 개입하여 중재 노력을 다하지 못했다는 점은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한국노총과 정부 모두 노사정위원회를 갈등의 중재자로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진단이다.
노사정위원회는 물론 자문기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수많은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노동·사회정책은 노사정의 사회적 대화를 통하지 않고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선진국들도 그 형태만 다를 뿐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대화를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입법과 정부정책을 구현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사회경제평의회, 일본의 노동정책심의회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노사정을 대표하는 33명의 위원과 다양한 전문가그룹, 120명의 직원이 경제 사회 노동 문제를 조사,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네덜란드나 노사정을 대표하는 30명의 위원과 다수 전문가가 분야별로 워킹그룹을 형성하여 상시적으로 정부 정책을 심의하고 자문을 담당하는 일본의 모델을 철저하게 연구해야 한다.
노동개혁을 위한 노사정의 대화는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을 뿐이다. 노동개혁 없이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세계 경제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다. 한국노총은 합의를 파기했지만 노사정위원회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사정위원회가 바뀌지 않고서는 앞으로도 사회적 대화는 겉돌 수밖에 없다. 정부, 노총, 경총을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약자가 참여해야만 양보와 타협, 조정과 중재가 가능하다. 제도 정비를 서둘러 주길 당부한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