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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법적 책임’ 없이 ‘日정부 책임’으로 위안부협상 끝냈다

입력 | 2015-12-29 00:00:00


한일 외교장관이 어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타결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상은 서울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회담한 뒤 발표문을 통해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軍)의 관여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상처를 입힌 문제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또 “아베 신조 총리도 총리대신 자격으로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다”고 전했다. 일본은 위안부 상처 치유를 위해 한국 정부가 설립한 재단에 일본 정부 예산 10억 엔(약 96억7000만 원)을 출연하기로 했다. 이에 윤 장관은 “일본 정부가 앞서 표명한 것을 확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일본 정부와 함께 이번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고 한국 정부의 입장을 밝혔다. 광복 70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인 올해가 가기 전에 양국이 한일 관계의 발목을 잡아온 최대 난제(難題)를 정부 차원에서 풀어낸 것은 다행한 일이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관계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아픈 과거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위안부의 존재가 처음 드러난 뒤에도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며 위안부 강제 동원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제 합의는 한국이 요구한 ‘법적 책임’이나 일본이 제시한 ‘도의적 책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대신 ‘군의 관여’와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에서 접점을 찾음으로써 가능했다. 한국에선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한 것으로, 일본에선 결코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각자 유리하게 해석하도록 ‘창의적 대안’을 내놓아 외교적 성과를 거둔 셈이다.

아베 총리가 양국 장관의 공동 회견 후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모든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사죄와 반성을 재차 밝힌 것은 평가할 일이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곧바로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한일 간의 재산청구권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최종적이고 완전히 해결됐다는 일본의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종전의 입장을 되풀이해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기시다 외상도 위안부 지원 기금에 일본 정부 예산을 출연하는 데 대해 “(법적) 배상은 아니다”라고 강조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체결된 1965년 한일 기본조약 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문안도 이번처럼 해석이 모호했다. 한국에선 강제병합조약이 불법이므로 식민지 지배도 무효였다고 해석한 반면, 일본은 체결 당시 합법이었으나 국교정상화로 무효가 됐다고 해석했다. 서로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가 50년 뒤 결국 문제가 곪아터져 박근혜 대통령이 해결에 나선 형국이다.

일본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법적 책임’, 배상 문제를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도 한국이 ‘이 문제가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고 못 박은 데 대해서도 정부가 일본의 압박에 휘둘린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일본 정부는 한일 외교장관회담이 열리기 전부터 합의되지 않은 내용을 일본 언론에 흘리면서 자신들이 정한 결론으로 한국을 몰아간 측면이 있다. 당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28일 “피해자들과 국민의 바람을 철저히 배신한 외교적 담합”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국가 간 협상에서 한쪽이 100% 만족하는 결과를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피해자들이 미흡하게 느낄 수는 있겠지만 46명밖에 남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합의를 이끌어 내야 했다는 현실적 한계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양국 정상이 협상 타결 후 예상되는 자국 내 일부 반발을 무릅쓰고 양국 관계의 최대 현안인 위안부 문제를 타결한 리더십도 인정할 만하다. 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 타결과 관련해 발표한 대(對)국민 메시지에서 “한일 관계 개선과 대승적 견지에서 이번 합의에 대해 피해자분들과 국민 여러분이 이해를 해주시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한국 정부는 관련 단체와의 협의를 거쳐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외교공관인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은 국제법이나 국내법상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내외의 다른 소녀상은 우리 정부가 관여할 여지가 없는 만큼 이 문제를 일본이 계속 물고 늘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과 일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나라다.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위협 같은 안보 문제와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협력해야 할 부분이 많다. 격변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개선은 한미동맹과 한미일 3각 협력 체제를 굳건히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합의 후 일본에서 총리나 각료, 정치인들이 협상 타결의 정신을 훼손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처를 덧내는 발언으로 어렵게 일궈낸 합의를 손상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