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간 질병 제로’ 칠레 아그로수퍼 농장을 가다
지난달 16일 칠레 라에스트레야 지역에 있는 아그로수퍼의 한 농장. 아그로수퍼는 농장을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차단해 ‘28년 동안 가축 질병 제로’라는 기록을 세웠다. 농장 내부에 있는 직원(사진 왼쪽)이 철장 안에 둔 짐을 밖에 있던 다른 직원이 찾아가고 있다. 이 역시 외부 사람과의 접촉을 철저하게 피하기 위해서다. 라에스트레야(칠레)=김성모 기자 mo@donga.com
아그로수퍼의 엄격한 심사를 거치고 난 뒤 발급받은 ‘농장출입여권’. 이 출입증을 받아도 하루에 한 농장만 방문할 수 있다.
“짐은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신발 속옷 겉옷 모두 사물함에 있는 것으로 갈아입으세요.” 일행은 가이드 뒤를 따라 들어갔다. 10평도 안 되는 샤워실에 옹기종기 모여 몸을 구석구석 닦은 사내들은 준비된 옷을 입고 단층 사무실 건물을 통과했다. 국경을 넘듯 관문에 관문을 통과해 들어선 곳. 발을 내딛자 130kg의 분홍색 돼지 한 마리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곧장 수천 마리의 나머지 돼지들도 일제히 기상. 사방에서 ‘꿀꿀’대는 소리가 천둥처럼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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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처럼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이곳은 사육 마릿수와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11위, 수익성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을 달리는 현지 식품업체 아그로수퍼의 한 돼지 농장. 칠레의 아그로수퍼는 현재 92개의 농장, 1031개의 축사에서 350만 마리의 돼지를 사육하고 있다. 연간 돼지 35만 t과 닭 33만5000t, 칠면조 6만 t을 사육해 한국과 미국, 일본 등 65개 국가에 수출하고 있는 초대형 축산업체다. 한국이 올해 들어 9월까지 수입한 칠레산 돼지고기 2만4000t의 90% 이상이 아그로수퍼산이다. 연매출 3조 원에 영업이익률이 17%에 이른다.
사실 농축산 강국으로 불리는 칠레는 농업을 주력으로 삼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이 많지 않고 그나마 있는 토지도 건조해 식물이 건강하게 자라기가 쉽지 않다. 칠레가 와인 사업을 주력으로 삼은 것도 주 재료로 들어가는 포도가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에서도 칠레는 방역 체계를 탄탄하게 해 세계적인 농축산업체를 탄생시켰다. 전문가들은 “칠레의 대표 축산 대기업인 아그로수퍼는 우리가 벤치마킹할 만한 롤모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현장에서 강조하는 것도 시설이 아니라 질병 관리였다. 하이메 리오스 아그로수퍼 생산총괄 이사는 “시설보다 중요한 건 질병 유입을 막는 것이다. 그게 수출의 비결이다”라고 기자를 보며 말했다. 아그로수퍼 농장에서는 1987년 이후 가축 질병이 단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다. 해마다 구제역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과는 상반된 모습. 농장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농장을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샤워를 해야 하는 것도 가축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 중 하나였다.
아그로수퍼의 농장은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들어가서도 힘들다. 일단 농장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이유가 있어도 절차가 까다롭다. 미리 본사에 신청을 한 다음 예방주사를 맞는 등 검사를 받고 이틀간 대기해야 한다. 해외에서 찾아올 때는 구제역 발생 지역에 다녀간 적이 있는지를 일일이 살핀다. 입출국 심사보다 엄격한 심사를 거치고 나면 사진이 박힌 ‘농장출입여권’이 지급된다. 출입증 역할을 하는 농장출입여권에는 농장을 드나들 때마다 도장을 찍어주는데 하루에 한 농장만 다녀갈 수 있다. 바이러스 한 마리조차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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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아그로수퍼는 가축 질병을 막기 위해 시스템의 일부를 자동화하고 인력은 최소한으로 쓰고 있다. 트럭에 실려온 새끼 돼지는 철조망 외부에서 축사 안으로 연결돼 있는 미끄럼틀을 타고 옮겨진다. 사료도 사람이 주지 않는다. 밖에서 트럭이 펌프통에 사료를 가득 채워 넣으면 알맹이들이 파이프를 타고 축사 내부로 들어간다. 축사의 적정 온도(19∼20도)와 습도도 기계가 조절한다.
갑자기 리오스 이사가 “보여줄 것이 있다”며 농장 깊은 곳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그곳에는 33m²(약 10평) 남짓한 공간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닥이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발라져 있는데 중간 중간 위치한 바둑판만 한 철문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가 손잡이를 잡아 올렸다. 쾌쾌한 분뇨 냄새로 어질어질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에는 폐사한 돼지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리오스 이사는 “돼지가 죽으면 잠시 이곳에 두고 죽은 이유를 밝혀낸 뒤 농장별로 각각 이동시켜 따로 묻는다”고 말했다. 농장에서는 보통 연간 1% 정도의 돼지가 죽는데 대부분 장이 꼬여서다. 돼지는 죽어서도 쉽사리 농장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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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철장으로 살짝 들여오면 안 되냐”고 묻자 리오스 이사는 “저 공간은 물건을 내보낼 때 쓰는 곳이다. 이건 내 권한 밖”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일행 중 한 명은 이날 몸에 비누칠을 네 번이나 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할까. “엘 디아블로 에스타 엔 로스 디타예스(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리오스 이사의 말이다. “사소한 것이 질병을 일으킬 수 있으며 나비효과처럼 칠레 축산업의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분뇨 처리 첨단 기술로 100억 원대 부수입
노력에 따른 보상일까. 질병을 막기 위한 아그로수퍼의 고군분투는 예상치 못한 소득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아그로수퍼는 10년 동안 1000억 원을 투자해 분뇨 처리 시스템을 개발했다. 처음에는 이 역시 질병을 막기 위해 고안됐다. 분뇨가 도랑 등 개방된 곳을 통해 이동하면 바이러스가 퍼져 가축 질병이 발생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처리장은 한마디로 넓고 거대한 ‘돼지 똥통’인 셈인데 축구장 몇 배 규모의 처리장은 검은색 천막으로 덮여 있었다. 돼지 똥오줌을 천막으로 덮어 두는 건 냄새를 차단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 분뇨에서 발생하는 가스를 모으기 위해서다. 분뇨 가스는 40%가 이산화탄소, 60%가 메탄가스인데 이를 파이프가 빨아들여 550도의 고열에서 연소시킨다. 아그로수퍼는 이러한 방식으로 연간 300만 t에 달하는 오수와 80만 t의 분뇨를 처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획득한 탄소배출권을 호주와 일본 등의 전력회사에 팔고 있다. 이 수입만 연간 100억 원이 넘는다. 2004년에는 유엔으로부터 농축산 분야에서 세계 최초로 기후협약실천기업 인증도 받았다.
연소하면서 발생하는 열은 다시 천막으로 보내져 아랫목에 있는 메주처럼 분뇨를 발효시킨다. 이후 가스가 제거된 분뇨를 오수와 딱딱한 고형분으로 나누는데 오수는 100% 정화해 농업용수 및 청소용으로 쓴다. 딱딱한 분뇨는 살균된 나무껍질을 섞은 뒤 비료로 만들어 고급 와이너리에 판매한다. 아그로수퍼는 이 비료를 판매해 연간 20억 원 정도의 매출을 추가하고 있다. 리오스 이사는 “가축 질병이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나 환경을 강화하는 추세다. 축산업은 기본적으로 분뇨가 생길 수밖에 없는 사업이기 때문에 이 사업을 유지하려면 한발 앞서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질병도 막고 환경도 지키며 돈까지 벌게 만들어 준다니. 직원들에게는 퀴퀴하다 못해 코끝을 찌르는 돼지 똥 냄새가 달게만 느껴질 것 같았다.
라에스트레야(칠레)=김성모 기자 m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