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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허문명]한일 정상회담에 바란다

입력 | 2015-10-29 03:00:00

허문명 국제부장


11월 2일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다. 2012년 5월 이후 3년 6개월 만에 열리는 첫 정상회담이다. 그런데 이번 회담에서 불편한 한일 관계를 반전시키는 획기적인 합의를 이뤄낼 수 있을까? 단언컨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지금 한일 관계는 갈수록 나빠지는 중이다. 본보 주일특파원들의 취재보고와 주한 일본 언론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일본 내 반한(反韓) 혐한(嫌韓) 기류는 점차 거세지고 있다. 오늘 자 1면에 보도된 대로 삼성이 일본에서 출시하는 스마트폰에서 로고를 지우고 나서야 매출이 올랐다는 내용은 충격적이다. 한때 일본 시장을 휩쓸듯 하던 김치 막걸리가 자취를 감춘 것은 물론이고 한류 덕에 큰 관심을 모았던 코리아타운이 차이나타운으로 바뀔 정도라고 한다.

아베 신조 정부는 미국을 지렛대로 중국에 맞서 아시아의 패자가 되고 싶어 한다. 자위대가 선봉이다. 자위대의 보폭 확대는 필연적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확대시킬 수밖에 없다.

아베 정권의 군사적 팽창 의도가 가시화하고 위안부 문제 등 일본의 안면 몰수적 역사인식을 바라보는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 보여준 대일(對日) 인식은 시쳇말로 ‘극혐’(극도의 혐오라는 뜻)에 가깝다. 한일 정상회담이 성사된다 해도 잘될 리 없는 이유들이다.

게다가 동아시아엔 이른바 21세기형 ‘군사주의를 동반한 민족주의 망령’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국의 앞뒤에서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은 중화주의로, 북한은 선군정치로, 일본은 신군국주의를 추구하며 군사력 확장을 위해 무한 경쟁 중이다.

과거 민족주의 구호들이 부딪치면 대개 전쟁이나 심각한 국가 갈등이 유발되곤 했다. 한일 관계뿐 아니라 주변을 둘러싼 정세는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다.

올 6월 15일 첫 회를 시작으로 본보는 ‘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시리즈를 30회 넘게 연재하고 있다.

연재 과정에서 내내 깨달은 것은 흔히 한일 관계 하면 ‘대립 갈등 침략 저항 멸시 증오’ 같은 단어를 떠올리지만 사실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와 우정의 교류를 해온 2000년이나 되는 역사적 자산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과 식민지 역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일제강점기 35년을 포함해 수십 년에 불과하다.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극에 달했던 상황에서도 조선은 국서까지 위조해가며 교류를 원하는 일본의 청을 통 크게 받아들여 통신사를 파견했다. 이후 두 나라의 선린관계는 300년간이나 지속됐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 말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나 마찬가지”였다. 세계 역사에서 유례없는 우호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6개월간의 시리즈 연재를 위해 일본에 다녀온 국제부 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만난 다양한 한일 국민들에게 한일 관계 악화의 원인과 해법을 물었을 때 이들로부터 돌아온 답은 이거였다.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든 것은 양국의 정치인들이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한미일의 동맹세력화를 바라는 미국 오바마 정부의 권유(내지는 요청)로 이루어졌다는 관측이 많다.

이번 회담에서 많은 결실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일 정상들이 2000년 우호의 역사를 자산 삼아 수십 년 갈등의 역사를 치유하는 첫발을 떼기를 기대해 본다. 마음만 먹는다면 미국이나 북한보다 만나기도 쉽고, 좋은 합의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한일 국민들의 호응도 엄청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가깝고도 먼 이웃이 아니라 형제이자 가까운 이웃이 될 수 있다.

허문명 국제부장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