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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걱정은 기우…한일축제한마당, ‘벽쿵’에 ‘심쿵’하다

입력 | 2015-09-22 15:42:00


심규선 대기자

축제는 원래 즐기는 것인데, 이번에는 배우고 왔다. 19일 서울 연세로와 20일 COEX에서 열린 한일축제한마당에서다.

COEX에서는 젊은이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부스를 발견했다. 살펴보니 모두 여성들이었다. 처음에는 유가타(浴衣·일본인들이 온천마을이나 축제장소에서 입는 옷) 체험부스인 줄 알았다. 이 행사에서는 매년 유가타 체험부스가 제일 인기가 많았기 때문. 그런데 부스의 이름이 묘하다. ‘카베동(壁ドン) 포토존.’ 벽이라는 뜻의 ‘카베’는 알겠는데, ドン(동)은 뭔가. 우동의 일종인가.

부스 앞에 세워둔 X-배너의 설명을 읽고 겨우 이해했다. “카베(壁·벽)와 동(ドン·벽을 칠 때 나는 소리)의 합성어로, 순정만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남자가 여자를 벽에 세우고 터프하게 벽을 치는 행동을 말합니다. 2014년 일본의 신조어, 유행어로 선정될 정도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단어입니다.”

내 무식을 탓하기에 앞서, 나와 젊은이들 사이의 거리를 확인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카베동’은 ‘I♥DK’라는 순정만화에 등장해 인기를 끌었고, 이 만화가 영화로까지 만들어지면서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친근한 단어가 됐다고 한다. 줄을 서고 있던 한국 젊은 여성 2명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일본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라면 다 아는 단어”라고 했다.

자기 순서가 돼서 부스 안으로 들어온 여성은 벽 앞에 선 뒤, 앞에 대기하고 있는 5명의 남자 중 한 명을 지명한다. 지명 받은 남자는 벽으로 다가가 벽을 치고, 잠시 포즈를 취해주면 이 모습을 친구가 찍어주고 있었다. 5명의 남자들은 일본 연예인 그룹 ‘코도모 드래곤’의 멤버들이라고 했다.

풀만 뜯어먹는, 남자답지 못한 남자란 뜻의 ‘초식남(草食男)’도 일본이 만들어 유행시킨 말이다. 초식남에 지쳐버린 여심은 스스로 벽에 서서 박력 있는 남자를 기다리게 된 것인가. 벽을 치는 남자가 연예인이라서-비록 이벤트이긴 하지만-더 큰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인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사회학자나 심리학자에게 맡기겠지만, 내가 느낀 것은 ‘변화’라는 단어였다. 기성세대가 발을 들여놓기에는 약간 주저할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도도한 변화라고나 할까.

‘카베동’을 우리나라에서는 ‘벽치기’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 한국에서 ‘심장이 쿵쾅거린다’는 뜻으로 ‘심쿵’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으니, ‘벽치기’보다는 ‘벽쿵’이 어떨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잠시 스쳐갔다. ‘벽쿵’이든 ‘심쿵’이든, 두 단어는 말하고 있다. 젊은이들끼리는 국적을 넘어 서로 통하며 살고 있다고. 세상에 치여 풀이 죽은 듯하지만, 그들만의 무대에서는 쿵쿵 발을 구르며 재미있게 살고 있다고.

이번 한일축제한마당에서 배운 것은 또 있다. 인간의 육체에 대한 경이로움과 컬래버레이션에 대한 발견이다.

육체에 대한 경이로움이란 출연자들이 노래를 부르든, 악기를 다루든, 춤을 추든, 궁극적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그들의 ‘몸짓’이라는 뜻이다. 한일축제한마당은 고전과 현대가 넘나들고, 어른과 젊은이가 뒤섞인다. 장르는 노래, 춤, 무용, 발레, 악대, 치어리딩, 농악 등으로 다양하고, 악기만도 피아노에서 이름도 모르는 옛 악기까지 다기하다. 이런 공연 30여 개를 계속해서 관람하다보면 결국은 공연의 종류에 관계없이, 악기 소리에 관계없이, 출연자의 나이에 관계없이, 그들의 ‘몸짓’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몸짓에 목소리와 악기소리가 달려와 붙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더욱이 일본 쪽 공연은 사전 지식이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출연자들은 때로는 뛰어오르고, 때로는 주저앉으며, 때로는 달리고, 때로는 멈춘다. 몸짓에 집중하면 그들이 무엇을 표현하려는지 대충은 알게 된다. 아니, 몰라도 된다. 내 방식대로 이해한다고 해서 뭐랄 사람도 없지 않은가.

컬래버레이션은 요즘 공연의 대세인 듯하다. 한 가지 장르만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장르를 융합해 무대를 꾸미는 것이다. 발레에 스토리를 입혀 연극처럼 끌어가고, 북과 일렉트릭 밴드가 함께 공연하는 식이다. 더욱이 한국과 일본은 정서적으로 통하는 게 많아 컬래버레이션이 자연스럽다. 한국 민요의 ‘어기여차, 어기여차’에 일본 민요의 ‘소오란, 소오란’이 뒤를 받치면 어느 곡이 어느 나라 것인지 의식하지 못할 정도다.

19일 연세로의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은 올해가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라서 특별히 기획한 행사였다. 여기서 배운 것도 있다. 축제는 역시 야외에서 해야 제맛이라는 사실이다. 원색의 물결이 차 없는 거리를 지나가면,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와 고개를 빼든다. 그들은 자기 편한대로 서기도 하고, 앉기도 한다. 출연자와 관람객 사이에는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람객들도 자연스럽게 축제에 녹아들고, 녹아든 관람객은 어느새 축제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변신한다. 출연자는 보여주고, 관람객은 보는 것이 아니다. 둘은 모두 같은 공기를 호흡한다. 실내에서는 좀체 얻기 힘든 분위기다. 축제라는 것에 그리 익숙지 않은 나로서는 야외 축제가 주는 ‘열기’ 같은 것에 잠시 몸을 담갔다 뺀 느낌을 받았다.

한일축제한마당은 올해로 11번째. 행사를 할 때면 언제나 한일 간의 관계를 걱정한다. 양국 갈등이 깊어지면 축제가 빛을 잃을까 해서다. 올해도 그런 걱정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걱정은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의 몫이었을 뿐, 행사장을 찾아준 시민들과는 관계가 없었다, 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던 19일 새벽에 일본 자민당은 집단적자위권 확보를 위한 안보법제를 참의원 본회의에서 강행처리했다. 그 뉴스는 TV와 라디오를 통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조선통신사 행렬을 바라보던 일반 시민들의 머릿속에는 집단적자위권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고 본다. 걱정은 해야겠지만, 걱정을 해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정치인들 아니겠는가.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20일 오전 COEX에서 열린 개막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멋진 화음을 들려준 소년소녀합창단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에 있는 양국의 꿈나무들입니다. 우리 꿈나무들을 보면서 한일 관계의 미래를 생각해 봅니다. 나무도 자라면서 온갖 풍파를 겪듯이 이웃한 국가 간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에게는 우기(雨期)보다 건기(乾期)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더 많은 수분과 영양분을 얻기 위해 더 깊고 더 넓게 뿌리를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 간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전 세계 어느 지역을 보아도 이웃한 국가들 간에 크고 작은 긴장과 마찰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을 어떻게 관리하고 지혜롭게 극복해 가느냐, 그리고 서로 간 신뢰의 뿌리를 얼마나 깊게 내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기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자연의 우기와 건기는 번갈아 오지만, 지금 한일 간에는 우기와 건기가 공존하고 있다고. 국가 간에 마찰이 상존하는 것처럼, 한 국가 내에도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라고. 다만. 공존과 파국을 가르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축제는 원래 즐기는 것인데, 쓸데없이 너무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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