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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14주년…작은 선행이 큰 감사로

입력 | 2015-09-11 21:27:00

14년 전 ‘9·11테러’ 당시 식료품 가게 물품 다 털어 구조 소방관과 경찰 지원 선행
윤건수 주빌리 사장, “내가 베푼 건 작은 호의였는데 그 후 너무 큰 보상 받아”
해마다 ‘그라운드 제로’ 추모 행사 끝나면 도움 받았던 경찰·소방관들이 가게 찾아와 인사
“9·11이 준 교훈은 ‘매사에 매 순간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자’는 것”



2003년 뉴욕 경찰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윤건수 사장



2001년 미국과 세계를 경악시킨 미국 뉴욕 맨해튼 9·11테러 이후 매년 사건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추모식이 열린다. 일부 소방관과 경찰은 이 행사에 참석한 뒤 여섯 블록 쯤 떨어진 허드슨 스트리트에 있는 24시간 유기농 식료품 가게(델리) ‘모건스 마켓플레이스(Morgan’s Marketplace)를 꼭 찾는다. 늘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은 이 가게 및 ‘주블리(Jubilee) 마켓플레이스’의 윤건수 사장(58).

14주년 기념식 전날인 10일(현지 시간) 맨해튼에서 만난 윤 사장은 “9·11테러의 끔찍한 장면이 요즘도 종종 생각나서 사건 현장 쪽으로는 일부러 가지 않는다. 그러나 추모식 당일엔 이들 소방관이나 경찰들을 기다리며 가게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식료품 가게의 한인 사장과 9·11테러 현장에 투입됐던 소방관과 경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게 문을 닫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세요.”(뉴욕 경찰)

2001년 9월 11일 테러 직후 윤 사장에게도 이른바 ‘소개령(疎開令)’이 내려졌다. 그러나 24시간 운영하는 가게여서 내릴 셔터 문도 없었다. 윤 사장은 히스패닉 점원들만 퇴근시키고, 한국인 매니저 4명과 함께 가게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면서 생긴 흙먼지는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가게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전원이 나갔고 휴대전화도 불통이었다. 윤 사장은 “테러 이후 6일 만에 전기가 들어왔고 그 때서야 집에 ‘무사하다’는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내가 잘못될 줄 알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게가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 안에 있어서 아내가 찾아올 수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구조 작업이 본격화된 지 서너 시간이 지났을까. 흙먼지를 뒤집어쓴 한 소방관이 잠시 휴식을 위해 윤 사장의 가게 쪽으로 걸어 올라왔다. 당시 구조 및 수색은 ‘4시간 작업하고 2시간 휴식하는’ 방식으로 24시간 교대로 진행됐다고 한다. 윤 사장은 그 소방관을 손짓으로 불렀고 얼음 통에 넣어뒀던 시원한 물과 얼굴을 닦을 종이타월을 건넸다. 바로 그 순간부터 ‘모건스 마켓플레이스’는 9·11 구조 및 수색 대원들이 기력을 회복하는 쉼터이자 안식처가 됐다. 담배 같은 일부 품목만 약 50%의 값을 받고 물, 맥주, 스낵, 빵, 화장지 등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처음 2주 간은 소방관들이, 그 다음부터는 뉴욕 경찰들이 이 가게에서 갈증과 허기를 채우며 휴식한 뒤 구조작업에 다시 투입되기를 반복했다.

윤 사장은 “나중에 대략 계산해보니 경찰과 소방관들에게 제공한 물품이 5만 달러(약 6000만 원) 어치가 넘더라”고 말했다. 당시 맨해튼의 일부 슈퍼마켓은 교통수단이 없어서 걸어서 퇴근하는 뉴오커들에게 평소 1~2달러 하는 물 한 병을 5~10달러에 파는 얌체 상술을 펴 지역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윤 사장의 선행은 금방 입소문이 났다. 뉴욕 보스톤 등의 일부 지역 신문과 방송에서 “9·11의 또 다른 영웅”이라고 소개했고 이 뉴스를 보고 시카고 로스앤젤리스 등에서도 “감동했다”며 성금을 보내오는 시민들이 많았다. 윤 사장은 “그렇게 몇 달러, 몇십 달러 씩 온 성금이 무려 3000달러가 넘었다. 그 돈도 9·11 희생자 가족을 돕는 단체에 기부했다”고 말했다.

윤 사장은 “특별한 생각 없이 그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소방관이 너무 안돼 보여서 물과 휴지를 건넸던 것뿐인데 그 후 여러 분야에서 너무 많은 보상과 혜택이 돌아와서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윤 사장 가게가 가입된 손해 보험에는 ‘테러 피해’에 대한 항목이 빠져 있었지만 보험회사가 “(당신의 선행을 감안해) 특별히 예외적으로 고려했다”며 3만5000달러의 ‘특별보상’을 해주기도 했다. 그 후 각종 물품 거래나 부동산 계약 등에서 상대방이 윤 사장을 알아보고 유·무형의 호의를 베푼 일이 많았다고 한다.

2003년엔 뉴욕시 경찰청 강력계 경찰 모임인 ‘어너 리전(Honor Legion)’으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당시 현지 언론은 “민간인이 이 단체로부터 상을 받는 건 매우 드문 일”이라고 평가했다. 한 한국계 뉴욕경찰은 “아직도 ‘9·11 직후 소방관과 경찰에 가게 물품을 모두 털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한인’으로 윤 사장을 기억하는 미국 경찰들이 있다”며 “윤 사장은 그 후로도 9·11 피해 경찰의 자녀 등에 대한 장학금 후원 등을 꾸준히 해왔다”고 말했다.

“9·11은 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작은 도움’을 주고도 너무 많은 걸 보상 받은 것 같아서 미안하고 송구할 때가 많습니다. 9·11이 저한테 준 교훈은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에 늘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9·11 테러 14주년을 맞은 소감을 묻자 돌아온 윤 사장의 대답이다.

뉴욕=부형권특파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