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국제부장
아베 신조 총리는 국제기구에서 잔뼈가 굵은 실세 외교관을 유네스코 특명전권대사에 임명해 국책사업으로 추진해왔다. 게다가 일본은 유네스코 분담금 1위 국가에 1999년 일본인 유네스코 사무총장까지 배출할 정도로 돈줄과 인맥을 쥐고 있는 나라 아닌가. 하지만 일본은 결국 독일 등 국제사회의 반일 여론에 굴복하고 한국과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 요구에 승복했다.
일본 외상의 말바꾸기 논란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최종 등재 결정문에 조선인 강제노동 사실을 적시하게 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우호적 한일관계 확립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대화를 나눈다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라는 걸 보여준 일이라 생각된다. 우리 민(民)과 관(官)이 일본과 더 많이 대화하고, 또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면 위안부 문제 등도 해결이 가능하지 않을까?
지난 주말에 전직 언론사 사장과 장관을 지낸 어르신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본보 시리즈가 화제에 올랐는데 이 자리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현역 시절 도쿄에서 연수도 하고 일본 정치인들과도 자주 교류한 전직 언론사 사장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와 세 번 만난 사이인데 그가 내 조상은 ‘경상도’라며 ‘형님국가’를 위해 건배하자고 건배사를 할 때 전율이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5공화국 때 청와대 경호실에서 일했던 한 전직 관료는 “84년 전두환 대통령 방일 때 사전 점검차 ‘황실’에 갔다가 우리가 옛날에 쓰던 놋수저 놋그릇에 대대로 한국식 김치까지 담가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번에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새삼 알게 된 것이지만 고대 한일교류 연구는 한마디로 봉인된, 어떤 면에서 금기시된 분야이다 보니 연구층이 매우 얇았다. 아무리 화목했던 집안도 100년이 지나면 옛날을 잊고 원수가 된다는데 광복 70년을 맞는 한일관계도 이렇게 가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한일 양국 모두 ‘일제 35년’에 발이 묶인 채 으르렁대며 조상에 부끄러운 역사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소식이 알려진 같은 날, 한국에도 낭보가 날아들었다. 백제유적들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한일수교 50주년이 되는 해에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한일 두 나라가 반일(反日)과 혐한(嫌韓)을 뛰어넘어 지구상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되고, 함께 인류에 공헌하는 미래를 꿈꿔 본다.
허문명 국제부장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