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파리 특파원
투어를 마친 후 마지막으로 그와 함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카페에 들어가니 카운터 뒤 작은 칠판에 적힌 무수한 사선 표시가 눈에 띄었다. 손님이 자신의 커피값 외에 다른 사람을 위한 커피를 기부한 표시였다. 이 때문에 돈이 없는 실직자나 노숙인도 당당하게 카페에서 기부한 커피를 달라고 요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카페 여주인은 “수년 동안 집에만 머물러 있는 실직자들이 커피숍에 나와 친구도 만나고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커피숍을 나오면서 기자도 다른 이를 위한 커피 두 잔 값을 기부하니 점원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렇듯 8년째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생존 노력은 눈물겨웠다. 재정난으로 공공서비스를 제대로 못하는 정부를 대신해 시민들이 집에서 먹다 남은 약을 기부해 무료 진료소를 만드는 등 공동체의식으로 위기를 헤쳐 나가는 모습이었다.
그리스 민간부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11년 6만7000유로로, 독일의 7만2000유로와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민간 근로자들의 노동시간도 1년 평균 2037시간으로 유럽에서 가장 긴 수준이다. 그런데도 그리스가 위기에 빠진 이유는 거대한 공공부문의 비효율과 저생산성 탓이다.
그리스의 경제위기는 근본적으로 ‘정치의 위기’다. 그리스는 1974년 군부독재가 무너진 후 우파 신민당(ND)과 좌파 사회당(PASOK)이 번갈아 집권해왔는데 양당 모두 표를 얻기 위해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리는 전략을 유지해왔다. 이 때문에 1970년대 20만 명이던 공무원은 83만 명까지 늘어났다. 그리스 공무원들의 임금은 민간부문보다 평균 1.5배가 많고, 공무원연금의 소득대체율은 95%에 이른다. 그리스 경제위기 동안 민간부문에서는 150만 명의 실업자가 생겼지만 공무원들은 감원 무풍지대였다.
올해 3월 초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프랑스 파리에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본부를 방문했다. 강연장 로비에까지 빼곡히 가득 찬 청중이 휴대전화를 들고 사진을 찍어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무색하게 하는 ‘슈퍼스타’ 대접이었다. 치프라스의 행보가 세계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강도가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올 1월 취임한 치프라스 정권이 채권단의 공공부문 구조개혁 요구에 맞서며 협상이 지지부진한 그리스에서는 매달 평균 59개의 중소기업이 도산으로 문을 닫고, 매일 613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공무원의 표를 의식해 ‘공무원연금 개혁’에 지지부진한 우리나라의 여야 정치권은 그리스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