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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 교수의 영원을 꿈꾼 천년왕국 신라]경주고분서 만난 광개토대왕

입력 | 2015-04-27 03:00:00

청동그릇에 새긴 大王 추모글 16자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 호우(그릇). 밑바닥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45년 12월 3일 새벽. 경복궁에 흰 눈이 쌓였다. 그 풍경을 바라보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의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이날 박물관이 개관하면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겨 부산행 열차표까지 어렵게 구했건만, 미군정은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억류 기간 연장을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불안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에 근무하던 전문직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교토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박물관에 채용된 아리미쓰는 관장에 해당하는 주임으로 일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 다른 직원들은 9월 21일자로 파면되었지만 그만 홀로 남아 박물관 업무의 인수인계를 담당했다. 그 임무가 끝난 12월 3일 그에게 새로 부여된 임무는 박물관 한국 직원들에게 고고학 발굴기술을 전수하는 일이었다. 독일에서 중국고고학을 전공한 김재원 박물관장이 미군정에 부탁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김 관장에게 경주 노서리 소재 140호분의 발굴을 추천했다. 과거 경주 근무 시절부터 발굴하고 싶었던 무덤이었다. 발굴을 개시한 것은 1946년 5월 3일. 그 소식은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전파됐고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매일 현장을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발굴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발굴 시작 8일째인 5월 10일. 무덤 위의 돌무지를 하나 둘씩 걷어내고 발굴자의 손길이 무덤의 바닥에 미쳤을 때 금동관 조각과 귀걸이가 주인공의 머리 쪽에 놓여 있었고, 머리맡엔 뚜껑 덮인 청동 호우(그릇)가 1점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보통 그릇처럼 보여 별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그릇을 들어내다가 그릇 바닥에 글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 관장을 비롯한 조사단원 모두는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명문은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의 16자였다. ‘을묘년(415년), 3년 전 돌아가신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추모해 만든 열 번째 그릇’이라는 뜻이다.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란 고구려의 영웅군주 광개토대왕의 이름이었다. 글자체 역시 만주 벌판에 우뚝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는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았다. 직접 말을 타며 영토를 넓히다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광개토대왕이 1500여 년이 지난 후 신라고분 속의 작은 그릇을 통해 되살아나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이었다. 무덤 이름도 호우총이 됐다.

호우총이 처음 발굴됐을 때는 무덤 연대를 호우가 제작된 415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으로 봤고 무덤의 주인공도 고구려와 관련 깊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래서 신라 17대 내물왕의 아들이자 19대 눌지왕의 동생인 복호(卜好)를 무덤의 주인공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복호는 412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다가 418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광개토대왕의 호우를 가져오려면 왕족이라야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근래에는 호우가 무덤에 묻힌 것은 415년에서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공도 복호가 아니라 복호의 후손이라는 의견까지 제기된 바 있다. 광복 후 신라고분 발굴 경험이 있는 일본인 고고학자, 발굴비와 행정지원을 담당한 미군정 관계자가 함께 관여해 추진한 발굴. 지금의 눈으로 보면 아쉬움이 남지만 호우총 발굴은 한국고고학 발굴 역사에서 획기적 사건이었고, 청동호우는 한국 고대사의 잊혀진 한 페이지를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가 됐다.

이한상 교수 대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