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96돌-광복 70돌]숭고한 희생… 고통 속에 남겨진 가족들
지난달 27일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만난 조명하 의사의 아들 조혁래 씨(왼쪽)와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안창열 의사의 손자 안상문 씨(오른쪽)가 일제강점기와 건국 초기 겪었던 삶의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건혁 기자 gun@donga.com
○ 영광스러운 희생…남겨진 가족의 고통
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919년 4월 1일 충북 음성군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본군의 총탄에 숨진 독립운동가 안창열 의사(1881∼1919)의 손자 안상문 씨(77). 안 씨는 “증조부께서 정3품 벼슬을 해서 유복했지만 조부께서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다 썼다”고 말했다. 안 의사 순국 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안 씨의 조모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객지 생활 때문에 안 씨의 부친도 병을 얻어 20대에 사망했다. 안 씨는 “1945년 학교에 들어갔는데 일본인 선생이 독립운동가 후손이란 이유로 모질게 매질했다”고 회고했다.
○ 늦었고 부족했던 국가의 지원
1928년 5월 14일 대만 타이중에서 일본 히로히토 왕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일본군 육군 대장 암살을 시도한 조명하 의사(1905∼1928)의 외동아들 조혁래 씨(89)도 독립운동가 후손 대우에 아쉬움을 표했다. 조 씨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는 조 씨 일가를 감시했고 조 씨는 학교에서도 일본인 교장과 교사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다 광복을 맞이했고 고향인 황해도 송화군은 북한 정권이 장악했다. 조 씨는 “인민군에 끌려갈 위기를 수차례 넘기고 간신히 남한으로 피란을 와서는 1963년에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생계를 꾸리려고 온갖 일을 해야 했다”고 기억했다. 그나마 조 씨와 안 씨의 상황은 나은 편이다.
현재 보훈처의 전체 보훈 대상자 85만7011명 가운데 독립유공자는 1만3930명으로 약 1.6%를 차지한다. 광복회가 추산하는 독립운동 참가자 300만 명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다.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 김시명 회장은 “6·25전쟁을 겪으며 광복 전 순국하신 분들은 자료가 없어지는 등 업적을 증명하기 어려워 보상이 늦어지거나 불가능했다”고 지적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활실태는 지금까지 제대로 조사된 적이 없다. 조명하 의사 기념사업회 조영환 사무국장은 “자수성가 아니면 지인들의 도움으로 삶이 정상화된 경우가 있을 뿐 국가 지원으로 기반을 닦은 사람은 없다”고 지적했다.
○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 존경받는 사회 돼야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국민들이 독립운동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달라고 주문했다. 조 씨는 “유명한 몇몇 의사 외에 수많은 독립유공자를 기억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건혁 gun@donga.com·정윤철 / 부산=황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