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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길 목사 “장애아 부모의 절망 보며… 기도만 하고 있을순 없었다”

입력 | 2015-02-28 03:00:00

[오뚜기와 함께하는 오뚜기인생]밀알복지재단 이사장 홍정길 목사




2월 13일 굿윌스토어 밀알구리점 개점식에 참석해 장애아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홍정길 밀알복지재단 이사장. 밀알 굿윌스토어는 기업들로부터도 물품을 기증받는데, 특히 오뚜기는 2012년부터 서울 송파점과 도봉점에 200만 세트 가까운 선물세트(총 4억 원어치)를 후원했다. 선물세트 조립은 장애아들의 일감이 된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그건 어느 부모의 기도에서부터 시작됐다.

“주여, 제가 죽기 1년 전쯤 제 아이를 먼저 데려가 주십시오.”

장애아를 둔 부모였다.

기도를 듣고 있던 홍정길 목사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교회 기도회에서 만난 장애아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모두 자기 집 지하실에 가둬놓고 키우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범죄’였다. 아이들을 교회로 데려오게 했다. 교회에서 뒹굴게 했다. 장애아 부모 기도회는 그렇게 시작됐다.

홍 목사가 1975년 설립한 서울 반포의 남서울교회엔 중동고 이사장이 다니고 있었다. 이사장의 얘기가 재미있었다. 학생들의 신앙 활동을 돕기 위해 학교 강당 의자를 교회처럼 모두 장(長)의자로 바꿨다는 것이다.

“혹시 주일에도 강당을 사용하십니까?”

홍 목사가 묻자 중동고 이사장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럼 우리가 주일에만 강당을 쓸 수 있겠습니까?” 1992년 1월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남서울중동교회는 그렇게 시작됐다. 새로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들 중에는 레스토랑을 오전 11시까지 빌려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고, 예식장의 ‘사각(死角) 시간’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의자가 놓인 학교 강당은 매우 훌륭한 편이었다.

당시 중동고 재단은 형편이 어려웠다. “중동고에 교회를 개척하면 교회의 모든 재원을 사학(私學)을 위해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를 맡고 있는 홍 목사는 그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2년 반쯤 흘렀을까. 중동고가 파산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교육청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교회에서 학교를 인수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아니, 빚이 얼마나 되는 데 그러는 겁니까?”

“100억 원쯤 됩니다.”

알아보니 학교 선생님들 집까지 사채에 잡혀 있었는데, 무려 18채나 됐다. 교회에 돌아와 상의하니 모두 좋다고 했다. 급히 은행 융자 17억 원을 받아 교사들 집을 풀어주고, 서울시교육청과 학교 인수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중동고 인수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동문들이 나서서 반대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의 모교가 바로 중동고였다. 중동고는 교회 대신 삼성이 인수했다.

홍 목사의 남서울교회로서는 좋은 일 하려다 뺨 맞은 격이 됐지만, 일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교육청에서 사람이 다시 찾아왔다.

“어차피 학교를 인수하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대신 자폐아를 위한 학교를 하나 세워 주실 수 없겠습니까? 서울엔 자폐아를 위한 학교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 사람들과 의논하니 역시 모두 좋다고 했다. 만장일치였다. 그게 남서울교회의 방식이기도 했다.

중동고 인수를 위해 융자 받은 17억 원을 포함해 32억 원으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맞은편에 1만500여 m²(약 3200평)의 터를 매입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 남서울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 건물 외에는 재산을 갖지 말자’ ‘예배당을 처음 건립할 때의 830석 이상은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결정하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당시 32억 원은 큰돈이었다. 홍 목사와 남서울교회 지도자들은 주변에서 장애인 시설을 가장 잘 운영할 수 있는 단체를 수소문했다.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평생지기인 손봉호 박사가 있었다. 손 박사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와 밀알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고 옥한흠 전 사랑의 교회 원로 목사, 고 하용조 전 온누리교회 담임목사, 이만열 전 숙명여대 명예교수, 그리고 홍 목사와 손 이사장은 모두 평생지기였다.

1979년 한국밀알선교단에서 출발한 밀알복지재단은 남서울교회가 찾는 적임자였다. 교회 재산을 늘리지 않는다는 약속에 따라 땅은 밀알복지재단에 맡겼다.

그런데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면 주변 집값이 떨어진다며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구청장까지 반대에 앞장섰다.

홍 목사는 아직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고 했다. “구청장이 자기가 있는 한 절대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만났는데 대뜸 각서를 써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집값이 떨어지면 교회가 보상해준다는 각서를 쓸 수 있느냐는 거죠. 강남구면 대한민국 지방자치의 1번지 아닙니까? 그런 강남구청장이 정말 이 정도밖에 안되나 싶어 밥 먹다가 그냥 나와 버렸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있는 와중에 허가권이 강남구청에서 서울시교육청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이번엔 주민들이 나서 교회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106억 원이나 되는 소송을….

“손봉호 박사가 ‘우리가 장애아동들을 보살펴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소하니까 주민 중 한 사람이 ‘당신 후손 중에 장애아들이 많이 나오면 되겠네!’라고 몰아쳤습니다. 그때 그 주민들을 대리한 변호사가 바로 고승덕 변호사였습니다. 그 고승덕 변호사가 작년에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나왔을 때 나는 솔직히 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1997년, 재판은 밀알복지재단의 승리로 끝났다. 언론매체들은 판결문 전문(全文)까지 게재하며 대서특필했다.

홍 목사는 “그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라고 기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애인 시설 허가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신축은 물론 증축도 어려웠다. 그런데 재판 이후 그동안 보류됐던 장애인 시설 허가 문제가 모두 풀린 것이다. 꼼짝달싹 못하고 묶여있던 전국의 장애인 시설이 무려 250군데나 됐다.

“정말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 대가가 더 혹독해도 좋았다고 할 정도로 감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손 박사하고 함께 결심했습니다. 장애아들을 위한 학교니까 정말 정성스럽게 짓자고! 새천년을 목전에 둔 1999년 12월에 대한민국 100대 건물을 선정했는데, 당시 KBS앵커가 우리 밀알학교를 7번째로 소개하면서 놀랍다는 탄성을 연이어 질렀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거기서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공부는 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유치부 13년을 마치고 아이가 장성하면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데 부모들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릴 때야 손이라도 꽉 잡고 있으면 되지만 다 큰 애는 부모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까지 봤다.

그나마 발달장애아는 낫다. 자폐아는 아무리 사랑을 쏟아부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부모들은 절망한다.

그런 부모들의 절망을 보면서 기도만 할 수는 없었다. 기업들은 장애인 고용 대신 범칙금으로 때우고 마는 실정이다. 기대할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아 유럽도 가보고, 미국도 둘러봤다. 유럽은 우리 현실과 맞지 않았다. 모든 것을 국가가 다 해주고 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미국의 굿윌(Goodwill)재단이었다.

1902년 미국 보스턴의 에드거 헬름스 목사가 장애인과 소외계층에 ‘자선이 아니라 기회’를 주자고 시작한 ‘굿윌’은 알뜰장터(thrift store)로 유명한 NGO였다.

“보통 한집에 1년을 살다보면 20∼30개의 쓰지 않는 물건이 꼭 나온다고 합니다. 그걸 (굿윌에) 내주기만 하면 됩니다. 사실 장애인들이 만들어 파는 물건은 한 번은 불쌍해서 사지만 두 번은 안 삽니다. 품질도 그렇지만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열에 일곱은 됩니다. 그게 우리 현실입니다. 하지만 굿윌 스토어가 기증받은 물건은 질 좋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여기 자주 오는 사람은 가끔 정말 싼값에 명품을 건져 ‘대박’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

장애아들은 기증받은 물건을 정리하고 간단한 손질을 맡는다. 꼭 직업이라고 할 건 아니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반긴다.

최저임금도 준다. 2014년엔 93명에게 최저임금을 줬지만 올해는 120명에게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굿윌의 정신 그대로 ‘자선이 아닌 기회’다.

“장애아들뿐 아니라 정말 돈 없는 사람들에게도 굿윌 스토어는 소중한 곳입니다. 원가의 10%에 필요한 것을 사고 나가면서 씩 웃는 분이 많습니다. 계산대에 ‘귀하가 지불한 물건값은 이달치 장애인 월급입니다!’라고 써있거든요. 다들 그렇게 좋아할 수 없습니다.”

현재 밀알복지재단의 굿윌 스토어는 서울 송파와 도봉, 전북 전주, 그리고 2월 13일 개점한 경기 구리점을 포함해 모두 네 곳이다.

홍 목사와 밀알복지재단이 꿈꾸는 건 장애아들의 ‘생애 4단계 주기’에 맞는 복지시스템을 완성하는 것이다. 교육하고, 직업훈련을 시키고, 일자리를 만든 다음 마지막으로 그룹홈을 실험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방 4개짜리 집을 얻어 건강한 가족과 장애아들이 함께 살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7개의 그룹홈을 운영하고 있는데,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그룹홈에서 살게 하고 주말엔 부모 품으로 보낸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그룹홈에서 계속 살게 되겠지만 아직 그런 경우는 없다.

“그게 남은 숙제입니다. ‘나 죽기 전에 자식을 데려가 달라’는 기도를 끝내야죠. 서울 집값이 너무 비싸 정말 어렵긴 하지만 이건 안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2008년 8월 북한 남포 육아원을 방문한 홍정길 목사. 그는 김일성 주석 사망 한 해 전인 1993년 ‘남북나눔’이라는 대북지원단체를 설립했다. 국내에서 처음 설립된 대북지원단체였다. 홍정길 목사 제공

▼“좋은 목사 되라고 했는데… 외할머니께 혼나겠네요, 하하”▼

‘조선의 聖女’ 서서평의 제자였던 외할머니


현재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와 밀알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홍정길 목사(73)는 만 4세가 되던 해까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외할머니는 일제식민지 시절 ‘조선의 성녀(聖女)’ ‘나환자들의 어머니’로 불린 서서평(徐舒平·1880∼1934)의 제자이자 동무였다. 서서평은 1912년 32세 처녀의 몸으로 조선에 건너와 평생 헐벗은 여성과 나환자들을 위해 살다간 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의 한국 이름. 그녀가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질 때 가지고 있던 것은 담요 반 장(반 장은 찢어서 나눠줌)과 동전 7전, 그리고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다. 침대 맡엔 ‘Not success but service(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글씨만 남아 있었고….

서서평은 완고한 경주 최씨 집에 시집갔다가 딸 하나 낳고 쫓겨난 홍 목사의 외할머니를 거둬줬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손자가 태어나자 외할머니는 “좋은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기도했다.

그러나 손자의 눈엔 ‘세상에 빌어먹을 게 목사’였다. ‘예수 안 믿어도 되는 핑계’를 만들려고 대학도 숭실대 철학과로 정했다. 철학과에서 가장 먼저 읽은 책도 버트런드 러셀의 ‘Why I am not a christian’이었다.

하지만 1965년 7월 25일 대낮의 햇빛(daylight) 보다 더 밝은 ‘그분’의 빛을 보고 목회의 길을 받아들였다. 그 빛은 그 이후에도 두 번이나 더 나타났다. 하지만 홍 목사는 “너무 신비한 얘기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안 된다. 그건 그냥 그분과 나의 비밀”이라고만 할 뿐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벌써 내가 외할머니보다 더 살았는데, 우리 외할머니가 원하던 좋은 목사는 못된 것 같아요. (웃으며) 하나님에게 혼나는 건 둘째 치고 우리 외할머니에게 혼날 것 같아요.”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