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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이석기 판결 논란의 진실

입력 | 2015-01-27 03:00:00


송평인 논설위원

대법원의 이석기 판결이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내용과 다르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헌재 결정은 항소심 판결 후에 나왔다. 항소심은 내란 선동 혐의만 인정하고 내란 음모 혐의를 부인했다. 헌재는 대법원 판결도 그 정도 선에서 내려질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헌재는 마리스타 회합에 대해 내란 선동이란 표현도, 내란 음모란 표현도 쓰지 않고 ‘내란 관련’ 회합이라고 불렀다.

헌재 결정문 어디에도 체계를 갖춘 범죄조직으로서의 RO에 대한 언급은 없다. 헌재가 RO의 실체를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측도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다만 ‘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 부산울산연합의 구성원들이 주도세력’이라는 등의 표현을 두고 RO의 실체를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란 음모, RO의 존재를 주장한 것은 헌재가 아니라 법무부와 검찰이다. 대법원은 내란 음모와 RO의 존재를 부인했고 헌재는 판단하지 않았다. 헌재는 개인의 처벌이 아니라 정당의 해산을 다루기 때문에 ‘내란 관련’ 회합의 존재와 그 회합을 주도한 것이 이석기 중심의 세력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봤다. 이 차이에 대해 헌재에서도 대법원에서도, 심지어 법무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검찰만 내란 음모가 인정되지 않아 다소 불만이 있을 뿐이다.

내란죄는 워낙 세분화돼 있어 어디까지가 내란 선동인지, 내란 음모인지, 내란 예비인지, 내란 미수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이런 때는 전문가들의 개념을 건너뛰어 팩트 그 자체로 향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건망증으로 잠시 잊고 있던, 마리스타 회합의 대화를 일부라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석기: (지금은) 준전시가 아니라 전쟁이다. …남녘의 우리 혁명가는 조선혁명이라는 전체적 관점에서, 남쪽의 혁명을 책임진다는 관점에서 현 정세를 바라봐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군사적 준비, 구체적으로 물질기술적 준비를 해야 한다.

이상호: 혜화동과 분당에 전화국이 있는데 거기에는 진공 형태가 돼야 하기 때문에 몇 개의 문을 통과하는 문제가 있으며 이런 것들은 목숨을 건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전선은 (전시에) 예비검속되면 사실은 별로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무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다.

이영춘: 북부에는 발전이나 지하철 철도 등 국가기간산업들이 많이 포진돼 있는데 그런 곳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고, 전시 후방교란을 잘해야 된다는 의견과 예비역 중심으로 팀을 꾸리고 군사적 대응 매뉴얼을 짜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이런 팩트이지 내란 선동이니 음모니 하는 사태 규정이 아니다. 이런 대화가 녹음됐다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다. 내란 선동인지 음모인지 구별할 수 없는 사람도 위험천만한 내란 관련 회합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알 수 있었다. 헌재의 ‘내란 관련’이란 말이 바로 그런 것, 내란 선동이나 음모로 개념화하기 이전에 즉각적으로 우리의 공분을 자아낸 그 무언가를 지칭한다. 대법원이 내란 음모를 부인하면서도 “내란 선동은 내란 음모에 준(準)하는 불법성이 있다”고 굳이 밝힌 것도 그런 공분을 거스르지 않으려 한 것이다.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언어가 진실에 이르는 것을 도와주기보다는 방해할 때 그 언어를 시장의 우상(Idola Fori)이라고 불렀다. 지금 내란 선동이니 음모니, RO의 실체가 있니 없니 하는 논란이 진실을 가리는 우상이다. 진실은 단순하다. 대다수 국민이 공분했고 그 공분에 값하는 통진당 해산과 이석기 처벌을 얻어냈다는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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