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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십시오” 6년 수배생활 하던 조영래가 찾아왔다

입력 | 2014-12-06 03:00:00

[이종찬 회고록]〈16〉 조영래와의 만남




1988년 5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 씨(오른쪽)의 위자료 청구 소송 첫 재판이 끝난 뒤 법정을 나오고 있는 조영래 변호사(왼쪽)와 권 씨. 현재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인 권 씨는 올 2월 설립된 성폭력 전문연구소 ‘울림’의 초대 소장을 맡고 있다. 동아일보DB

민정당 창당 작업을 하느라 중앙정보부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던 1980년 8월 어느 날(나의 수첩에 기록된 일자), 조영래 군이 나를 찾아왔다. 계엄령하의 긴장된 분위기가 사회구석구석을 휩쓸 때였다.

“선배님, 저는 경기 61회 후배로 선배님 도움을 받고자 왔습니다. 사실 그동안 수배를 당하여 6년간 피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 값진 희생이라 생각합니다. 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사법연수원 재학 중에 구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법연수원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세상도 바뀌었고, 저도 새롭게 출발하고 싶습니다.”

조영래 군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묵직하였다. 그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조 군과 장기표, 이신범 등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을 당시 수사관으로부터 그의 심문 받는 태도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절대 비굴하지 않고,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태도였다고 모두들 오히려 칭찬하는 말을 했었다. 사실 중앙정보부에 불려오면 기부터 죽는데 그는 당시 24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고 했다.

수사관이 진술조서를 잘못 쓰면 가르쳐가면서 여유 있게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문에 이골이 난 수사관도 이렇게 나오면 호감을 갖는 법이다.

“자네를 오늘 처음 만나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내가 돕는다면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선배님이 법원행정처장에게 얘기해서 저를 다시 복교만 시켜주시면 되겠습니다.”

“알겠네, 열쇠는 법원행정처장에게 있단 말이지? 한번 알아보겠네.”

나는 조영래 군을 진정으로 돕고 싶었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유난히 정의감이 강했다. 고등학교 때 이미 한일회담 반대데모를 주도했고, 법과대학을 다닐 때는 1년 선배인 정형근이 학원출입 형사에게 정보를 누설했다고 주먹으로 한방 먹여 그 선배가 도망치도록 만들었다는 얘기로도 유명했다.

며칠 후 나는 서일교 법원행정처장을 찾아갔다. 서 처장은 당시 총무처장관을 그만두고 법원행정처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사회분위기가 매우 삼엄한 시절, 중앙정보부의 간부가 찾아온다는 사실에 서 처장은 약간 긴장한 듯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자세를 낮추고 인사를 했다.

“사실 개인적인 일로 찾아왔습니다. 저는 처장님의 서랑(壻郞)인 장재룡 군 내외와 영국대사관에 근무할 때부터 친형제처럼 지냈습니다.”

우선 그분이 안심하고 나를 믿을 수 있도록 분위기부터 잡았다.

“오늘 찾아뵌 것은 조영래 군이라고, 장재룡 군과는 고등학교 동기이고 우수한 인재입니다. 최근 수배가 해제되어 저를 찾아왔는데, 이제 어엿한 법조인으로 인생을 새 출발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장님께 선처해 주십사 부탁드리려 왔습니다.”

서 처장은 열심히 메모를 하고난 후 “내가 자세한 사항을 모르니 일단 알아보고 우리 다시 의논하면 어떨까요?”라고 신중하게 답변했다.

며칠 후 서 처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영래 군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도 보고 실무진의 의견도 들었습니다. 가급적 구제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려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조 군 사건은 중앙정보부에서 취급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관에서 의견서를 보내주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즉시 현홍주 정보정책 국장을 찾아갔다. 현 국장은 가장 실무에 밝을 뿐 아니라 세상을 법의 테두리 내에서 좁게 보지 않고 시야가 매우 넓었다. 그러므로 이 정도의 일은 쉽게 뛰어넘을 것 같아서 기탄없이 말할 수 있었다.

“조영래 군 알지요? 나에게는 경기 후배일 뿐인데 현 국장에게는 법대까지 후배이니 잘 배려해 주십시오. 그전부터 이런 재목은 우리나라의 인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경솔한 운동권 같지는 않고, 신중하게 우리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사람 같습디다.”

“저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지도급이지요. 나도 개인적으로는 재목이라 생각하지만 실무적으로 한번 검토를 해야겠습니다. 또 내부절차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는 그러면서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그러면 조영래 군에 대하여 이 선배께서 보증하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나도 웃으며 “이렇게 부탁할 때는 보증한다는 말이나 같지요”라고 대답해줬다.

‘서울의 봄’으로 조 군의 수배는 해제되었지만 계엄이 확대되는 시점이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합수부)의 협조도 필요했다.

8월 21일 드디어 합수부로부터 “잘 처리하여 정보부로 넘겼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 현 국장이 중앙정보부의 의견으로 ‘가(可)하다’는 통보를 법원행정처에 보냈다.

1982년 그는 사법연수원을 졸업했다. 애초부터 판사나 검사를 꿈꾼 것은 아니었으므로 변호사로 사회에 기여하는 길을 찾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 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나는 국회에 진출해 정무에 쫓겼지만 그와 잘 어울리는 친구들 일행을 만나는 것이 퍽 즐거웠다. 그리고 언제나 유익했다.  
▼ 담배 한 개비에 변론 한 문장… “그를 데려간 건 시대라는 癌” ▼

조영래 변호사와 담배


초대 민정당 원내총무(1981∼1985년)에 이어 정무장관과 사무총장까지 마치고 잠깐 여유를 찾은 이종찬 의원은 1990년 3월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개최하는 연례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다.

JC(당시 이 의원을 부르던 영문 이니셜)는 먼저 뉴욕부터 들러 옛 친구들과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밤늦게 호텔에 들어섰는데, 조영래 변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었다. 시간을 보니 자정이 가까웠다. 호텔 로비에서 무료하게 책을 보며 기다린 것 같았다. 족히 두어 시간은 기다렸을 것이다.

“조영래 군 앞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마치 서낭당의 돌무더기를 보는 듯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세월이 흘렀지만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그때의 담배꽁초 더미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아니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나?”

“특별한 일은 아니고 뉴욕영사관에 물었더니 여기 묵고 계시다고 해서 찾아뵌 겁니다.”

조영래 변호사는 당시 미국 컬럼비아대학 인권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인권변론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호텔 바에 들어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한참 늦어서야 헤어졌다. JC는 조영래의 담배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담배를 너무 피우는 것 같아. 그거 몸에 해로운 데 말이오.”

조영래는 웃으면서 “알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게 됩니다”라고 했다.

JC는 그해 겨울 조영래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12월 12일 숨을 거둔다.

조영래 변호사의 서울대 법대 1년 후배인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의 ‘조영래 평전(2006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1986년 이른바 ‘권(인숙)양 사건’ 때의 이야기다.

“법조계에는 품위와 격조를 유지하면서도 대중적 호소력을 갖춘 필력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 이렇듯 드물고도 드문 필력의 소유자 중 하나가 박원순이다. 그러나 박원순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초고를 일별한 조영래는 아무 말 없이 덮어둔다.…변론기일이 불과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박원순의 초안을 거의 제쳐놓다시피 하고 영래는 자신이 직접 펜을 들었다. 예의 지필(遲筆)이 꿈틀거린다. 담배 한 개비에 한 문장의 속도다. 한 문단을 쓰고는 입술로 읽어보고 이어 소리 내어 음독한다. 그러고선 다시 펜을 고쳐 잡는다. 이것은 그냥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다.…내심 섭섭했던 박원순은 선배가 쓴 변론서를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사건의 본질을 깨달았다.”

‘권 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그 유명한 조영래의 변론 원고는 그렇게 탄생했다.

담배 한 개비에 한 문장으로, 그렇게.

안 교수는 “그의 때 이른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내린 진단은 ‘시대암’이었다”라고 적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