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금융’ 논란/원로의 쓴소리]
우리은행장 내정설 등으로 촉발된 최근의 ‘정치(政治)금융’ 파문에 대해 금융계 원로들의 쓴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전문성과 능력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하는 금융회사의 인사(人事) 문제에 권력 최고위층이 부적절하게 개입하면서 금융계가 나름대로 쌓아 온 원칙과 절차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종휘 전 우리은행장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내가 당시 수석부행장인 이순우 행장에게 자리를 물려주면서 다른 건 몰라도 최고경영자(CEO) 승계 과정만큼은 굉장히 신경 써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런 경영 승계가 전통으로 자리 잡기를 바랐는데 이게 무너진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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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훌륭한 절차를 순식간에 허울로 만들어 버리는 외부의 압력이다. 여기서 외압의 주체는 금융당국이 아닌 핵심 권력층, 또는 그 주변에서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가신(家臣) 그룹을 말한다. 현 정부 들어 낙하산 인사를 떨어뜨리는 주체가 관료들이 중심이던 과거 ‘관치(官治)’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금융지주 회장은 “가장 힘이 센 ‘윗선’들은 금융권 CEO 정도는 그냥 아무나 가서 하면 되는 자리라고 생각한다”며 “특히 금융계에서 일해 보지 않고 정치만 하던 사람들은 전문성, 능력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한 전직 시중은행장도 “시스템을 아무리 잘 만들면 뭐 하나. 권력층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 한 모든 게 엉망이 된다”며 “위에서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주고 싶을 때 제일 쉽고 폼 나는 곳이 금융기관”이라고 말했다.
대학교수 등 외부의 민간인으로 구성된 행추위원들도 정권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깜냥’이 안 되는 낙하산은 뽑지 않겠다”고 용기 있게 반기를 들 수는 있지만 그 후에 ‘비협조적’이라는 평이 돌아 정부에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전직 금융회사 CEO는 “소신을 꺾지 않고 괜한 고집을 부렸다가 나중에 사외이사 자리가 나도 못 가고 정부 용역도 못 받을 수 있다”며 “한번 찍히면 ‘풀’에서 영원히 제외될 수 있다는 생각에 교수들이 소신껏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금융계 원로들은 최근의 ‘정치금융’ 현상이 결국엔 금융회사의 경영 리스크를 키우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은 “전문성 있는 금융인을 기르지 못하고 낙하산 인사가 계속된다면 하루 이틀은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금융위기 등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때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조준희 전 기업은행장은 “정도경영, 이런 거 하기도 바쁜데 인사 때마다 압력이니 뭐니 해서 시끄러우니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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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금융지주사 고문은 “당국이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금융회사 내부에서 CEO가 나오는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라며 “인사 문제만큼은 금융기관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홍익대 전성인 교수는 “예를 들어 3년 정도의 금융사 근무 경력을 임원 자격으로 명시하면 최소한 정피아(정치인 출신 마피아)는 막을 수 있다”며 “교수들도 정부가 주는 ‘자리’나 용역에 예속되지 말고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윤정 yunjung@donga.com·송충현·유재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