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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강수진]중년 남성을 위한 판타지 미생

입력 | 2014-11-12 03:00:00


강수진 문화부장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드라마 ‘미생’이 화제다. 금요일 방영되는 미생을 보기 위해 직장인들은 불금(불타는 금요일)에도 술자리 대신 TV 앞에 앉는다. 원작 만화는 이미 150만 부나 팔렸고 9만9000원짜리 전집(총 9권)도 하루에 2000세트씩 나간다.

인터넷에선 ‘직장인을 위한 탈무드’라는 찬사와 함께 미생 어록이 전파된다. “최선은 학교 다닐 때나 대우받는 거고, 직장은 결과만 대접받는 데야.” “숙일 땐 숙이는 거야. 그게 임원의 품위라고.”

미생은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인 고졸 계약직 장그래가 대기업 정사원을 꿈꾸며 세상을 배워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주인공 세대인 20대보다 40, 50대의 시청률이 4배 이상 높다.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이 보는 연령층도 40, 50대다.(닐슨코리아 8일 방영분 수도권 기준)

평소 드라마와 거리가 먼 50대 회사 선배도 “와이프들이 보면 좋을 드라마”라며 미생은 챙겨본다. 아닌 게 아니라 “미생 덕분에 샐러리맨 남편을 이해하게 됐다”는 주부들 소감도 잇따른다.

지인 중 50대 중소기업 대표, 40대 대기업 부장, 20∼30대 남녀 회사원들에게 가장 애정이 가는 캐릭터를 물었다. 실력은 에이스지만 남녀차별을 당하는 여주인공 안영이와 직장과 육아에 허덕이는 맞벌이 주부 선 차장을 꼽은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드라마가 보고 싶은데 너무 다큐(현실) 같아서”란다.

▽장그래=주인공임에도 공감을 못 얻었다. 해맑게 순수한 캐릭터 때문이다. 20대 들은 자기 능력을 몰라주자 곧바로 이직을 고민하는 엘리트 신입 장백기가 더 와 닿는다고 했다.

▽김 대리=30대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상사 오 과장을 모시고 햇병아리 장그래를 배려하며 인력이 부족한 영업3팀의 업무를 도맡는 모습에서 다들 스스로를 봤다.

▽오 과장=중년 남성들은 “진짜 주인공은 오 과장”이라며 애정을 보였다. 승진에 뒤처져도 소신을 지킨다. 실수한 부하 직원을 위해서 싫어하는 상사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90도로 허리를 굽힌다. 야근에, 회식에 바빠 세 아이의 자는 얼굴만 보면서 아내의 잔소리를 듣지만 갑(甲) 노릇 하는 고교 동창 바이어 앞에선 고개 숙이며 을(乙)이 되는 가장이다.

미생은 살벌한 직장의 리얼리티를 살리면서 회사에 헌신했던 중년 남성의 로망도 슬며시 보여준다. 자신을 인생의 멘토처럼 따르는 신입, 열악한 여건에도 똘똘 뭉쳐 성과를 내는 팀워크, 퇴근 후 하루의 고단함을 서로 위로하는 후배들과의 술자리.

아날로그식 인간관계를 중시했던 중년 남성을 위한 직장 판타지 같다.(심지어 원작 만화에선 오 과장이 아내의 격려를 받으며 사표를 내고 독립하는 직장인 판타지의 끝을 실현한다!)

현실에선 오 과장도, 장그래도, 영업3팀도 없을지 모른다. 오히려 드라마 ‘직장의 신’에 나왔던 대사가 요즘엔 더 맞을런지도. “직장은 생계를 나누는 곳이지 우정을 나누는 곳이 아닙니다.”

바둑 용어인 미생(未生)은 완생(完生)의 요건인 두 집을 내지 못한 돌을 뜻한다. 샐러리맨이 쓴 댓글들을 읽다가 한 인용구에서 눈길이 멈췄다. 비범한 재능이란 고통을 끝없이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오 과장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는 버티는 것이 이기는 곳이야. 버틴다는 건 완생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강수진 문화부장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