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1970∼ )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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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삼킨 듯 서늘해지는 시다. 한강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서 옮겼다. ‘피 흘리는 언어로 뜨겁고도 차가운’ 시들을 읽으면서 그의 참담한 시간을 엿보는 듯했다. ‘희랍어 시간’에서 ‘소년이 온다’까지, 한강 씨는 점점 소설을 잘 쓴다고 감탄했는데, 예술은 삶의 고통을 담보하게 마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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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에 대한 체감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큰 불행을 겪으면 삶이 망가지기 쉽다. 우선 불행 자체가 고통이고, 자기가 불행한 사람에 속한다는 사실이 수치심과 열패감의 나락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불행은 삶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감각을 깊게 한다. 예민하고 명민하고 강한 사람인 시인은 그렇게 다시 떨치고 일어난다. 박명(薄命)을 박명(薄明)으로 만든다.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화자는 영하의 바람이 부는 새벽거리에 나선다. 감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왜? 그 오랜 밤의 절망과 슬픔을 정갈하게 갈무리하려고. 정수리까지 살얼음지는 그 감각으로 단단한 걸음을 내딛는 첫새벽이다.
황인숙 시인